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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군 역사]
양구군은 고구려시대에 요은홀차(要隱忽次)라 하였는데 신라 제35대 경덕왕 16년(757)에 양록군(楊麓郡)으로 고쳤으며 고려때에 양구현(楊溝縣)으로 고쳐 춘주(春州) 지금의 춘천에 예속되었다. 그후 다시 양구(楊口)로 고치고, 고려 제16대 예종원년(1106)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나 낭천(狼川)(지금의 화천) 감무가 겸임 하여 오다가 이 태조 2년(1393)에 각각 분리 되었다. 태조 13년 (1404)에 현감(縣監)을 두게 되고 제26대 고종 32년(1895)에 강원도 양구군(楊口郡)이 되어 서면, 남면, 하동면, 서동면, 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 상동면의 9개면을 관할하였다. 그 후 1908년에는 화천군에 병합되었다가 곧 복구되어 1914년 군, 면 폐합에 따라 서면과 서동면을 군내면 으로 남면과 하동면을 합하는 동시에 춘천군 북산 외면의 수산리를 병합하여 남면으로, 상동면을 동면을 고치고 그 나머지 면(북면, 방산면, 해안면, 수입면)은 그대로 두어 7개면 85개리로 개편하였고 1917년 군내면을 양구면으로 개칭하였다.
1940년 화천댐 건설로 북면 일부가 수몰됨에 따라 1941년 북면을 폐면하여 양구면과 방산면에 각각 분할 편입시켰고 1945년에 38도선이 생김에 따라 남면 일부를 제외하고 전지역이 공산치하에 강점되었으며' 한국전쟁 이후 수복되어 1954. 3월부터 군정을 펴오다가 동년 11월 17일 민간정부에 이양과 동시 수입면은 완충지대가 되고 해안면은 인제군으로 편입되었다.
그후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해안지역이 다시 양구군 동면으로 편입되면서 해안출장소가 되 었고 1979년 5월 1일 양구면의 읍 승격으로 양구읍, 남면, 동면, 방산면의 4개 읍면을 이루었으며 1983년 2월 15 일 해안출장소가 해안면으로 승격됨으로서 5개읍면 76개리를 관할하고 있다.
양구지역의 문화재
양구지역은 지역의 특성상 6.25전쟁 때문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소실되어 남아있는 유적이 많지 않다. 양구지역에 있는 문화재로 강원도에서 지정한 것은 심곡사에 모셔진 목조삼존불(도유형문화재 125호), 고대리2지구고인돌군(도기념물9호), 공수리고인돌군(문화재자료 109호), 고대리1지구고인돌군(문화재자료 110호), 해안선사유적(문화재자료 133호), 돌산령지게놀이(도무형문화재 7호)가 있고 국가지정 문화재는 개느삼(천연기념물 제372호),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246호), 열목어(천연기념물 258호), 독수리(천연기념물 243호)가 있다.
1. 심곡사 목조삼존불(深谷寺 木造三尊佛)(유형문화재 제125호)
양구군 동면 팔랑리 도솔산에 위치했던 심곡사는 양구지방에서는 비교적 역사가 오래고 규모 또한 다른 사찰에 비하여 컸다. 목조삼존불상은 심곡사지 대웅보전에 모셔져 있던 불상으로 전쟁당시 국군 모부대장이 남면 구암리에 암자를 짓고 봉안했다가 수복 후 양구읍 송청리 현재의 심곡사 대웅전에 봉안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불상은 조선후기의 목불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9년 3월 20일 강원도 유형문화재125호로 지정되었다. 이 목조삼존불은 본존의 높이가 71cm, 너비 47cm, 앞뒤너비가 49cm이며 우협시는 높이 63cm 너비 37cm 앞뒤너비가 40cm이고 좌협시는 높이 65cm 너비 37cm 앞뒤너비가 40cm이다. 이들 불상에서 나온 복장물로는 강희 55년 (1716)6월 改金佛事때 慶巖스님외 71인의 승려 명단과 당시 현감 徐明世가 〈身安長壽 子孫榮光之願〉이라고 쓴 발원문이 본존불을 제외한 두 협시불에서 나왔다. 크기는 각각 123㎝ × 90㎝, 75㎝ × 90㎝이다. 발원문의 내용으로 보아 여기에 봉안된 삼존불이 아미타불(阿彌陀佛),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임을 알 수 있다.
2. ‘고대리 2지구’ 고인돌군(도 기념물 9호)
북한강 상류의 양구지역 일대에는 청동기시대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유적이 고인돌과 선돌로서 최근까지 수십 여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양구지역의 고인돌ㆍ선돌들은 각종 댐공사ㆍ농지개량사업ㆍ건축ㆍ도로공사 등으로 파괴된 것이 많다. 1호 고인돌은 1971년에 강원도 기념물 9호로 지정된 이후 보존을 명분 삼아 상부구조물인 덮개돌과 굄돌만을 원 위치에서 포장도로 쪽으로 옮겨 세우고 보호철책을 둘러 놓았었다. 1987년에도 이미 수몰의 위험이 없는 높이인 해발 200m선의 포장도로 옆 부지에 이전된 상태였다. 1992년에 하부구조에 대한 발굴이 진행된 이후 또다시 양구읍 하리 양구선사박물관으로 이전․ 복원 되있다. 1호 고인돌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전형적이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이다. 375×370×78㎝ 크기의 편마암 덮개돌 밑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굄돌 2개가 쓰러지지 않은 채 온전히 세워져 있다. 덮개돌의 둘레는 약 1,170㎝에 이르며, 덮개돌 아래의 양쪽 긴 벽을 이루고 있는 굄돌의 크기는 각각 176×60×40㎝, 138×58×55㎝정도이다. 2호 고인돌은 편마암 덮개돌만이 겉에 드러나 있는 개석식이다. 덮개돌은 상당히 풍화가 진행된 상태이며, 그 형태는 부정형이긴 하지만 한쪽 끝이 뾰족하게 돌출된 삼각형에 가깝다. 동서 방향이 약간 긴 편이며 돌출된 부분은 동쪽을 향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약 300×240×95㎝ 정도로서 상당히 둔중해 보인다. 3호 고인돌은 현재 공수리 - 고대리 일대에서 발견된 고인돌중 가장 규모가 큰 탁자식 고인돌이다. 거의 타원형에 가까운 편마암 덮개돌은 북서쪽의 일부가 깨져서 지상에 떨어져 있고, 나머지 남동쪽 부분은 굄돌에 걸쳐져 기울어진 상태이다. 덮개돌의 크기는 대략 472×391×63㎝ 정도로 추정된다. 장축은 북서 - 남동방향으로 놓여 있다.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화강암 굄돌은 현재 동․ 서쪽 긴 벽 2매와 남쪽 짧은 벽 1매가 ㄷ 자 형태로 남아있다. 동․ 서쪽으로 긴 벽을 이루고 있는 굄돌의 크기는 각각 216㎝×97㎝×49㎝, 217㎝×97㎝×48㎝ 정도 된다. 서쪽 굄돌의 한쪽 모서리 부분 일부가 켜를 따라 깨어져 나갔고, 그 조각은 바로 아래쪽에 떨어져 있다. 한편 남쪽의 짧은 벽을 막고 있는 굄돌에서 정으로 쪼아낸 흔적이 뚜렷하게 관찰되는 점, 네 벽을 막고 있었을 굄돌 중 북쪽의 짧은 벽이 트여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어느 시기엔가 도굴이 자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굄돌을 막아 이루어진 무덤방 내에는 잔돌들이 고르게 깔려 있다. 이곳에 남아 있는 2기의 고인돌은 본래 ‘양구선사박물관’으로 이전된 나머지 1기의 고인돌과 어울려 삼각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군집을 이룬 3기의 고인돌 중 2기는 전형적인 탁자식이고, 나머지 1기는 개석식인 점이 주목된다. 돌칼, 돌화살촉등의 석기류와 고인돌과 가까운 지점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4점을 채집하였으며, 그릇형태를 파악할 수 있는 입술부분이나 바닥부분은 없으며, 4점 모두 몸통 부분이다.
3. 공수리고인돌군 (문화재자료 제109호)
본래 고인돌떼가 자리하고 있던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양구군 양구읍 공수리(公須里)에 해당되며, 자연부락 명칭은 ‘주막거리’이다. 공수리의 고인돌떼는 바로 이‘주막거리’마을 앞에 넓게 펼쳐진 서천가의 충적대지 위에 강물의 흐름과 같은 방향으로 나란히 일렬로 자리잡고 있었다. 현재는 양구읍 하리에 건설된 ‘양구선사박물관’내 고인돌공원으로 이전되었다. 공수리의 고인돌떼가 발견된 계기는 『평화의 댐』건설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86년 12월부터 ‘평화의 댐’기초공사 작업을 위해 화천댐 파로호의 물을 방류 하면서 수몰되기 이전의 옛 모습이 다시 되살아나게 되었고, 공수리 고인돌떼는 1987년 1월부터 3월까지 행해진 강원대학교 박물관의 자체 지표조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이웃한 고대리의 고인돌은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었던 반면에, 이곳 공수리의 고인돌떼는 전문 연구자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상태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대리 지역은 공수리보다 파로호의 최상류지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고인돌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는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고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공수리 지역은 1944년에 화천댐이 축조된 이후 오랜 기간 수몰지역이었기 때문에 수위 변동이 잦아 본격적인 조사의 계기가 마련된 일이 없었던 처녀지였다. 파로호 퇴수지역 내에서 강원대학교 박물관의 자체 지표조사가 있은 후, 1987년 4월 8일부터 12일까지 강원도 문화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적인 파로호 퇴수지역 유적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기간동안 공수리의 고인돌떼 뿐만 아니라 새로 찾은 고인돌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가 이루어졌고, 북한강 상류의 대규모 구석기 유적인 상무룡리유적을 발견하는 계기도 되었다. 파로호 퇴수지역내의 중요한 선사유적 발견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재 수몰 이전에 발굴 되어야 할 필요성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비등한 여론에 힘입어 공수리 고인돌떼에 대한 발굴조사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발굴기간은 1987년 11월 22일부터 12월 15일까지 24일간이었다. 1차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후 공수리 고인돌떼는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왜냐하면 수위변동에 따라 고인돌이 물에 잠기고 노출되기를 계속 반복할 경우 유적 자체의 훼손 정도가 심각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 양구군은 이곳의 고인돌떼 전체를 발굴해 내고 수몰선 밖에 마련된 ‘양구선사박물관’으로 이전․ 복원하여 야외 전시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이러한 양구군의 뜻에 따라 공수리 고인돌떼의 이전․ 복원을 위한 2차 발굴조사는 강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1992년 4월 8일부터 7월 2일까지 실시되었다. 공수리 고인돌떼는 현재 파로호로 유입되는 하천인 서천가에 펼쳐진 충적대지 위에 강물의 흐름과 평행하게 일렬로 배치되어 있었다. 1987년의 조사 당시에는 강줄기의 흐름을 따라 북서에서 남동 방향으로 대략 320m 거리에 10기가 늘어서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10기 중에서 가장 동쪽의 것을 1호 고인돌로, 가장 서쪽의 것을 10호 고인돌로 명칭을 부여하였다. 하지만 그 후 1992년 발굴 당시에는 새로이 2기의 고인돌이 더 발견됨으로써, 강물의 흐름을 따라 373m 정도의 거리에 걸쳐 12기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고인돌의 번호에도 약간의 변경이 있었는데, 가장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가면서 일련번호를 부여한 원칙은 변함이 없었다. 1987년에 1차 발굴이 진행된 6․ 8․ 10호 고인돌은 1992년 2차 발굴에서는 7․ 9․ 11호 고인돌로 변경되었다. 공수리의 ‘주막거리’에 분포하고 있는 고인돌떼의 배치 상황은 하천을 끼고 있는 산악지대의 협소한 충적 평지에 10기 이상이 동서 일렬로 배치된 군집현상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공수리의 고인돌은 형식상 크게 탁자식과 개석식으로 구분되며, 그 하부에는 돌무지 시설을 갖추고 있다.
4. 고대리 1지구 지석묘군 (문화재자료 제110호)
양구에는 이미 동면에 지석리(괸돌)란 마을이 있다는 사실로 보아 고인돌이 특징적으로 많은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현재까지 남아 있는 고인돌이 상당수 있으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쌍선돌이 남면 용하리에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양구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에 큰 사회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당시의 성읍국가의 존재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대리 1지구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던 곳은 행정구역상으로 양구군 양구읍 고대리 1반 샛말에 위치하고 있었다. 출토유물로는 반쯤 부러진 간돌도끼가 있다. 1987년 지표조사 과정에서 모두 6기의 고인돌이 발견되었으나 2기만이 양구선사박물관으로 이전 복원되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소실되었다. 양구의 고인돌은 현재 1992년에 세워진 양구읍 하리 선사박물관 야외에 있는 고인돌공원에 상당부분 옮겨져 있다.
5. 돌산령지게놀이 (1996년 제 36회 전국 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종합우수상인 국무총리상 수상 - 강원도 무형문화재 7호)
양구는 대암산·봉화산·사명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험준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물 맑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 옛날 이곳 주민들에게 나무는 취사·난방·농기구 제작·건축자재 등 일상생활에 밀접하게 이용되었으며 나무를 땔감으로 팔아서 양식과 의복을 구입하기도 하는 등 가계 수입에도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돌산령 지게놀이는 당시 나무를 하러가는 팔랑마을 나무꾼들이 돌산령을 오르며 하던 놀이로서 성행하였다. 나무를 하러가는 한 젊은이가 지게장단을 치며 동네를 한 바퀴 돌면 나무꾼수가 점차 늘어나게 되고 장단은 점차 흥겨워진다. 40여명의 나무꾼들이 산을 오르다가 지게 상여를 꾸며 편을 갈라 싸움을 하기도 하고 장례 절차를 그대로 흉내내는 등 장난을 치다보면 어느덧 목적지에 이르게 된다. 잘살지는 못했지만 여유와 풍류가 가득한 산간생활 문화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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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마당 :지게탑 쌓기 놀이
경연단은 양쪽 마을로 나뉘어 경연장의 두 방향에서 입장을 하고 농악은 중앙에서 입장을 한다. 지게장단소리, 얼러지타령이 입장하는 동안 계속 나온다. 입장이 끝나면 산신에 대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지게탑을 쌓고 제례와 고사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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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마당 :지게걸음 놀이
고사소리가 끝나면서 양편은 지게걸음놀이를 할 수 있는 대형으로 만들고 서로 편을 나누어 지게걸음으로 이동을 하여 상대방을 밀어 떨어 뜨린다. 최후까지 남은 쪽이 이긴 것으로 하여 함성을 지르고 지게상여놀이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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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지게상여놀이
지게걸음놀이가 끝나면 양편으로 다시 서로 나뉘어 지게와 지게작대기를 이용하여 지게상여를 꾸민다. 농악과 함께 주위에서 흥겹게 논다. 상여가 다 꾸며진 마을이 먼저 지게를 치켜 들고 양쪽 상여가 올려지면 상여소리에 맞춰 이동을 한다. 상여꾼은 선소리와 뒷소리를 맞춰 한쪽 손은 정해진 동작을 취한다. 두 지게상여는 S자를 그리며 서로 교차하면서 상여소리의 선소리와 뒷소리를 구성지게 주고 받는다. 상여소리에서 불리는 뒷소리는 어러~~, 어~허어"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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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마당 :회다지놀이
상여놀이가 끝나면 횟대를 들고 두 개의 원을 만들어 맞춰 회를 다진다. 느린소리로 시작한 회다지는 두 사람씩 횟대를 교차하며 흥겹게 다지다가 자진소리가 시작되면 횟대를 내던지고 어깨를 걸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회다지를 하며 이때 뒷소리는 "에헤.호~오리 도울해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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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마당 : 지게싸움놀이
회다지 놀이가 끝나면 지게상여는 "어허" 구령에 맞춰 놀이마당을 돌며 서로 기세를 올린다. 가운데서 만난 양편의 지게 상여는 서로 밀고 밀리며 힘겨루기를 한다. 어느 한편이 밀려 넘어짐으로써 지게싸움이 끝나고 이긴 편은 지게상여에 사람을 태워 더욱 기세를 올리며 놀이 마당을 돌고 진편은 그 뒤를 따른다. 이로서 지게놀이는 모두 끝나고 농악대와 기수가 앞장서서 흥겨운 장단에 맞춰 지게장단을 치며 퇴장한다.
6. 개느삼자생지(천연기념물 372호)
양구군에는 자연생태계가 잘 보존된 지역으로 희귀동식물이 많이 서식하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한전리 산54, 동면 임당리 산148, 149등지에 소재하며, 1992년 12월 23일 천연기념물 제372호로 지정된 개느삼자생지이다. 개느삼은 우리나라 특산 식물로서 1속 1종이며 자생지는 땅 힘이 약한 왕모래의 척박지이고 양지바른 숲 가장자리의 선구 식물이다. 개느삼은 함경남도 북청에서 채집된 바 있으나 그 후 양구에서 발견된 희귀식물로서 전세계에서 이 두 군데에서만 자생하고 있다. 그러므로 북한계분포지가 북청이고, 양구는 남한계분포지에 해당한다. 콩과에 속하는 낙엽활엽관목으로 이른 봄에 황금색꽃이 황홀하게 피며 새가지 끝에 5∼6개 꽃이 달리고 꽃잎은 뒤로 젖혀지며 키는 50cm내외이다. 수술10개가 서로 떨어져 있으며 윗부분이 약간 꼬부라지는 것이 특이하며 예전부터 한방에서는 뿌리를 건조시킨 후 가루를 만들어 꿀을 섞어 약재(환약)로 조제하여 구충제와 위장약으로 사용했다. 또 노란꽃이 만발하기 때문에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다.
7. 대암산·대우산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246호)
강원도 양구군과 인제군의 경계에 위치한 대암산(1.314m)은 "커다란 바위산"이란 뜻처럼 산자락부터 정상까지는 바위들이 펼쳐진 험한 산이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마치 잔디 깔린 축구장처럼 보이는 "용늪"이 나타나는데 "하늘로 올라가는 용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89년 자연 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지정된 대암산 용늪은 차갑고 습기가 많아 특수한 식물(사초류, 식충식물, 물이끼 등)들이 많이 모여 살며, 용늪의 물속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미생물들과 주변의 고산 지대를 연하여 살아가는 새들 역시 용늪을 터전으로 살고 있는 생물들이다. 펀치볼 지대로 불리고 있는 해안면은 지름 약 10km의 원형분지이고, 밑바닥은 해발고도가 평균 500m이고 분지벽은 1,000m나 된다. 지질적으로는 분지벽과 주변의 산릉들은 편마암으로 되어 있으나 분지 밑바닥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이곳의 하계망은 구심상으로 되어 있다. 대암산의 서북에 자리잡은 고지습원인 큰용늪은 지형상 국지적으로 직각상의 하계망을 나타내고 있다. 외국의 전형적인 고층습원(Pseudo highlandmoor)이라는 것이다. 펀치볼, 큰용늪과 작은용늪은 지질학적으로 특이한 지세와 기후적인 특이성으로 인하여 백두산 중복에 있는 대택, 장지등 습원과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큰용늪(해발 약 1,200m)은 1,200-1,300m의 고지에서 자라는 낙엽활엽수림에 싸여있고 그곳에서 자란 식물체가 쌓여서 토탄상태가 되어 지표수를 높여주고 있다. 용늪의 바닥에는 채 썩지 않은 식물들이 쌓여 스펀지처럼 물컹한 지층을 이룬 이탄층이 발달해 있다. 보통 식물이 죽으면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어 땅 속에 묻히게 되는데 기온이 낮고 습기가 많은 습지에서는 식물이 죽은 뒤에도 썩거나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쌓여 연못같은 형태로 짙은 갈색의 층을 이루게 되는데 이것이 "이탄층"이다. 용늪에 만들어진 이탄층은 장소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평균 1m 깊이이며, 깊은 곳은 1m 80㎝나 된다. 습원에 자라는 대표적인 것으로 물이끼(Sphagnum cymbifolium), 끈끈이주걱(Drosera rotundifolia), 조름나물(Menyanthes trifoliata), 비로용담(Gentiana jamesii), 가는오이풀(Sanguisorba tenuifolia), 삿갓사초(Carex dispalata), 통발(Utricalaria japonica), 줄풀(Zizania caudiflora), 왕미꾸리꽝이(Glyceria leptolepis), 골풀(Juncus effusus), 숫잔대(Lobelia sessilifolia), 달뿌리(Phragmites japonica)와 기생꽃(Trientalis europaea) 등이 있다. 특이한 식물로 백두산에 흔히 나는 비로용담, 장백제비꽃(Viola biflora)과 조름나물이 나고 있다. 그리고 백두산 중복 대택에서 자라고 있는 바늘사초(Carx chordornhiza)가 나고 있다. 습원 둘레의 산지에는 철쭉나무, 사스래나무, 개박달나무, 까치박달, 떡갈나무, 신갈나무, 꽃개회나무, 함박꽃나무, 귀롱나무, 참회나무, 메역순나무, 복장나무, 고로쇠나무, 단풍나무, 시닥나무, 물푸레나무, 갈매나무, 층층나무, 달피나무, 딱총나무, 다래덩굴, 병꽃나무와 백당나무 등의 낙엽활엽수들이 모여살고, 분비나무, 잣나무와 노간주나무 등의 상록침엽수가 드문드문 나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금강초롱과 산구절초 둥근이질풀과 산오이풀 등이 나고 있다. 화산구에 물이 고인 것이고 정상부근에 솟아 있는 왕관바위는 조면암질의 용암으로 되어있고 암질의 차이에 따른 차별침식에 의한 산물이다.
8. 열목어(천연기념물 258호)
휴전선 이남에서 열목어의 서식지로 알려진 곳은 강원도의 한강상류 일대와 경상북도 봉화군 낙동강 상류의 일부 뿐이다. 열목어는 냉수성 어류로서 서식지는 수온이 낮은 상류 구역뿐이고 개체수가 매우 적은 희귀종이다. 눈에 열이 많아 눈알이 새빨갛다고 하며 열을 식히기 위하여 찬물을 찾는 까닭에 열목어(熱目魚)라고 부른다. 열목어는 연어과에 속하며 20℃ 이하의 차가운 물에서 사는 민물고기이다. 연어과의 다른 종에 비하면 우둔하게 생긴 얼굴에 입이 작고 몸의 바탕색은 황갈색이며 머리·몸통·등에는 자갈색의 무늬가 불규칙하게 흩어져 있고 배쪽은 흰색에 가깝다. 알을 낳을 때는 온몸이 짙은 홍색으로 변하며, 등지느러미와 가슴지느러미 부분에는 무지개 빛의 광택을 내어 아름답다. 물 속에 사는 곤충이나 작은 물고기를 먹고 산다. 큰 것은 전장이 70㎝이상에 달한다. 열목어는 1972년 5월 방산면 천미리의 장재대 계곡과 6월 5일에는 동면의 귀농선 북방 남한계선이 설치된 건솔리의 수입천 중류의 두타연에서 서식하고 있음이 처음 발견되었다. 동년 10월 한국 자연보존연구회 담수 조사반에 의해 재확인되고 두타연은 한국에서 최다서식지로 알려졌다.
9. 독수리(천연기념물 243호)
중앙아시아의 초지, 티벳, 몽고에서 번식하고 겨울철에 우리나라를 찾는다. 암컷과 수컷 모두 몸 전체의 깃털은 검은색이다. 이마, 머리꼭대기, 눈앞, 뺨, 턱밑, 앞목에는 짧은 솜털이 촘촘하게 나 있다. 뒷머리에는 다소 긴 부드러운 솜털이 있고, 귀 부근에서 뒷목 사이에는 살색의 피부가 나출되어 있어 일명 “대머리독수리”라고도 부른다. 폭이 넓고 긴 날개를 일직선으로 뻗어 펄럭이지 않으면서 유유히 날다가 먹이를 발견하면 부근의 땅 위로 내려와 양쪽 다리를 합쳐 함께 튀듯이 접근한다. 먹이는 짐승의 썩은 고기, 오리, 물새 등이다. 독수리 먹이주기 활동은 지난99년 박성열(양구군방산면)독사모회장이 날개를 다친 채 탈진해 있던 독수리에게 동물의 사체를 주면서 시작됐다. 양구를 찾아오는 독수리는 꿩과 토끼, 설치류를 직접 사냥하는 검독수리와 달리 사냥능력이 없다. 이에 겨울 철새인 독수리가 수년전부터 무리를 지어 양구군 방산지역을 찾자 주민들이 해마다 먹이주기 활동을 벌이고 있다. 양구군 방산면 현리지역에는 겨울철새로서 대머리독수리가 지난 99년부터 매년 300여 마리씩 날아오고 있었으나, 기후변화 및 자연생태계 변경등으로 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정도가 되었다. 10. 해안선사유적(문화재자료133, 철기시대)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에 위치한 양구 해안 선사유적은 구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이 한 지역에서 출토되는 보기 드문 유적이다. 유적의 북쪽에는 도솔산에서 발원한 해안천이 동류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성황교 아래에서 성황천과 합류하여 인제군 서화면에서 서화천과 합류한다. 유적은 해안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크게 구릉지대와 그 북쪽 평지가 유적에 해당된다. 현재 산구릉 지역은 지속적인 개간으로 인하여 표토층은 멸실되어 가고 있다. 현재 구릉지역에는 나무가 식재되어 있는데, 이 식재과정 중에 일부 유구가 파괴되어 있다. 특히 최근 동쪽 소로 옆 밭으로 개간하는 과정 중에 주거지 1기가 완파된 것이 확인되었다. 구릉 밑의 유적은 2001∼2002년 제방공사 중에 많은 부분이 다시 파괴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쇠소칼(철도자)·원형점토대토기·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빗살무늬토기 등의 구석기시대로부터 철기시대까지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양구 해안유적은 특히 원형점토대토기와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가 집중 출토되고 있어, 우리나라 중부지역의 철기문화의 전래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는 유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