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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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의례
- 전설
마을신앙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동신의 명칭을 계통상으로 분류하면 천신, 일신, 성신, 산신, 수신(樹神), 지신, 수신(水神), 사귀, 인신(人神)등이다. 이러한 마을 신앙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은 산신, 서낭신, 국수신, 장군신, 용신, 부군신 그리고 장승, 솟대 신앙으로 나타난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남향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뒷산 중턱 또는 산 정상에 산신을 모신 산신당이 있는 것이 양구 지역의 대체적인 경향이다.
양구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각 읍, 면, 리, 반 등으로 나누어 본다면 양구지역 전체적으로 약 80여개소의 마을 동제가 행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도 점차적으로 우리의 농촌문화가 기계화, 산업화, 노령화 되면서 축소 내지는 전승의 단절로까지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양구 지방에서도 고래로 현령(縣令)이 주재해서 치제하는 성황단이 비봉산(飛鳳山)에 있었고, 안대리에는 사직단(社稷壇)이, 함춘리에는 여단(癘壇)이 있었다. 그래서 진신(鎭神)에의 치성(致誠)은 성황사(城隍詞)에서, 농사의 기원은 사직단에서 잡귀(雜鬼)의 위안은 여단에서 각기 해마다 춘추로 치제(致祭)해 왔다.
제일(祭日)이 정해지면 제수(祭需)를 장만할 집을 선정해서 도가(都家)로 삼는다. 사흘 전에 도가와 성황단에는 금색을 치고 황토를 뿌려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엄금하고, 제물은 가장 정결하게 봉공(奉供)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다. 만약 그 사이에 동네에서 초상이나 그 밖의 부정 불결한 일이 발생하면 부득이 제일을 연기하던가, 아니면 부정한 집에 출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한 뒤에 근신하고 재계한 사람들만으로 치제하기도 하였다. 제일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성황사에 모여 제를 올린다. 부락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개는 연장자가 헌관(獻官)이 되고 차례대로 책임이 정해져 질서 정연하게 제사가 행해진다. 곳에 따라서는 홀기(笏記)를 창(唱)하면서 치제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낸 다음에는 모든 제물을 모인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음복한다. 이 성황제는 먼 옛날부터 누구나 숭신사상(崇神思想)이 짙어서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해서 자발적으로 정성을 드리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기적인 대제(大祭)말고도 가정에 불안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단독으로도 간소한 제물을 마련하여서 곧잘 치제하는 경우가 많았고, 간혹 이러한 일을 찾아 볼 수 있다. 남면 가오작리의 ‘서낭골’, 도촌리의 ‘산제(山祭)나뭇골’, 적리의 ‘산제골’, 양구읍 학조리 삼선당의 ‘성황당(城隍堂)’, 월명리의 ‘서낭거리’, 당골(堂谷)의 ‘성황당’, 안대리의 ‘산제당(山祭堂)골’, 동면 임당리의 ‘서낭골’, ‘작은 서낭골’ 등은 모두가 성황당이 소재(所在)한데 연유하여 이름 한 곳이다.
동면 월운리
- 1. 제의의 명칭
산청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8월 13일 밤 10시
- 3. 제 물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어물, 제주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여성은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금색은 산신당과 도가집에서만 한다.
동면 임당2리
- 1. 제의의 명칭
산청제
- 2. 제 의 일 시
3월 3일, 9월 9일 오전11시
- 3. 제 물
돼지, 메(새옹밥), 시루떡,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수퇘지만 사용, 제사전 돼지를 마을에서 잡는데 반드시 산신당 앞에서 잡는다. 비용은 각 가정에서 쌀 한 되를 각출하며 나머지 비용은 마을 기금에서 사용한다. 과일은 사용하지 않는다.
동면 팔랑2리 5반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8월 14일
- 3. 제 물
돼지 한 마리, 포, 어물, 메(과일은 올리지 않는다.)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유교식제의, 소지, 제관은 3명, 금색은 일주일 전에 치며 제주로 일주일 전에 담근다. 비용은 마을 공공기금으로 한다.
해안면 현1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음력 8월(날받이)
- 3. 제 물
돼지머리, 주, 과,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양구읍 학조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9월 9일
- 3. 제 물
돼지머리, 북어 20마리, 메, 3채, 삼실과, 포
- 4. 제 차
제사 한달 전에 제당에 금줄을 친다. 제일(祭日) 전날 제물을 장만하여 제당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은 2명이며 윤번으로 돌아가면서 도가와 제관을 맡는다. 과거에는 돼지를 잡아 통째로 진설하였으나 축소되었으며 축문은 전승되지 못하였고, 주민 모두가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소지만 올린다.
양구읍 안대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 3. 제 물
돼지머리, 메, 삼탕, 삼실과,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도가와 제관은 점쟁이가 정하여 준다. 도가에서는 시장보기, 음식장만을 한다. 도가는 개ㆍ닭고기 등을 먹지 못하며 부인과 동침하지 않는다. 또한 도가와 제관이 정하여 지면 도가와 제당에 금색을 친다. 제의가 끝나면 마을 주민이 음복한다.
양구읍 상3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 3. 제 물
돼지고기, 삼실과, 포, 메
- 4. 제 차
도가와 제관은 제사일 사흘전 생기복덕을 맞추어 선정한다. 도가와 제관은 닭ㆍ개고기를 먹지도 않고 잡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산신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도가 1명과 제관 2명을 선정한다. 음력 2월 그믐에 가구별로 경비를 염출한다. 그리고 초하룻날 시장을 본다. 제사 당일 돼지고기는 새벽에 삶고 메는 산신당에 가서 직접 짓는다. 그리고 유교식으로 제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아침에 음복한다.
남면 죽2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음력 9월 9일
- 3. 제 물
닭, 삼실과, 북어, 포, 밥 2그릇, 소금 3접시, 정한수
- 4. 제 차
제사 보름전 이장이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정하며 제관과 축관도 같은 방법으로 선정, 위패는 나무로 깎아 산천지신위라고 쓴다. 위패는 제사후에 태우거나 제당 주위에 꽂아둔다. 제사일에 닭을 잡아서 산제당으로 제물과 함께 가지고 올라간다. 제관들은 제물을 진설하고 유교식으로 제사하게 된다. 축문과 홀기가 있다. 닭을 쓸 때에는 반드시 닭털과 닭의 피를 고기와 함께 올리며 닭털과 피는 제사 후에 제당 밑에 묻는다.
비봉산 서낭제
양구 고을의 현감이 주재하던 이 제의의 전승은 끊어졌으나, 1984년도 강원도 민속경연대회 때 양구의 민속놀이로 변형시켜 선을 보였다. 원래 비봉산 서낭제는, 제사일이 정해지면 도가를 선정하고 3일전에 도가와 서낭당에 ‘검줄(儉繩)’이라는 금줄을 치고 부정을 가렸다. 부정한 사람은 서낭당 근처에 접근치 못하며, 택일한 후에 초상이 나거나 부정한 사건이 발생하면 제사를 연기하였다. 서낭제에는 목욕재계한 사람만이 참석하나, 마을사람 모두가 신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겼다. 헌관은 대개 연장자 순으로 정하였다. 이 서낭제를 놀이화한 한마당의 내용은 서낭당에 관련된 구비설화인 <변부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양구읍 고대리에 부자이었지만 인색한 변부자가 살았는데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을 보게 되어 애지중지 하면서 키웠다. 그러나 아들은 커가면서 싸움질과 행패를 일삼아 마을 사람들과 변부자를 괴롭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변부자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는 그가 몹쓸 병에 걸려 누워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변부자의 아들이 서낭당에 올라가 오줌을 싸고 금줄을 끊어 불에 태워 버렸으니 앓아 눕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들 수군거렸다. 게다가 이 재앙이 변부자 뿐 아니라 양구고을 전체에도 내릴 것이라고 웅성거렸다. 변부자가 유명한 점쟁이를 불러 물었더니 서낭신의 노하심으로 비롯한 재앙이라고 하였다. 변부자는 길일을 택하여 서낭신에게 굿을 해주고 지성으로 빌어 마침내 아들을 살려내었다는 것이다.
방산면 동두보제
방산면의 송현리와 장평리 자월(自月)을 연결하는 4km에 이르는 동두보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숙종 때 장사인 박제룡이 엄동설한에 홀로 박달나무 가래로 구축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의 보는 그 터에 근래에 와서 콘크리트로 다소 개축해서 쓰고 있는 것으로 관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유달리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박장사를 아직도 박장군이라고 부르며 많은 전설들이 남아있다. 그가 이 보를 만들 때 이 모양을 보고도 비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늘 술과 담배를 권하며 달랬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이런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해마다 음력 4월 8일이 되면 송현1, 2리와 장평리 자월부락 사람들은 공동으로 제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왔다. 제사를 지낼 때 금기를 철저히 하고 산신(山神), 수신(水神), 박신(朴神) 등 세 위패를 모시고 송현 동두봉의 강기슭에서 보(洑)제사를 지내면서 그 해의 풍작을 빌었다. 예전에는 소를 잡아서 제상을 차렸지만 근래에 와서는 돼지를 잡아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제사를 지내는 의식절차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제관인 박장사의 9대손인 박현준은 말한다. 박장사의 묘는 장평리 자월에 있으며 그 후손들은 지금 같은 자월부락 샛마을에 살고 있다.
도솔산 기우제
높이 1,148m인 도솔산은 동면 팔랑리와 만대리 경계에 있는 고산으로 양구읍에서 동쪽으로 16km나 떨어져 있으며 예부터 ‘돌산령 타령’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사연을 많이 전해주고 있다. 또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해병대 1개 연대가 적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격전지이다. 포격이 멎은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동식물의 보고로 널리 알려진 명산이기도 하다.조선시대에는 동면과 해안면 주민들은 한 해 농사철에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 죽어 버릴 기상조건이면 돼지머리를 비롯한 제물을 부락민 공동으로 준비하여 관내의 사명산ㆍ대암산과 제당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의식 절차에 따라 제관이 제물을 진설하고 난 후에 소지를 올린다. 당시만 하여도 이 도솔산에는 호랑이가 득세하여 호랑이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한 공동의 금기를 지키며 마을 공동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제사를 겸하여 지내기도 하였다. 1587년(선종20년) 김현도 양구현감 때 당시 도솔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암산 용연 기우제
동면 팔랑리와 만대리 그리고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와의 경계에 있는 높이 1,316m의 대암산이 있다. 이 산은 펀치볼분지의 외랑산릉(外廊山稜)인 대암산에서 북방 약 2km지점에 위치하는 무명의 산봉(1,304m)서 남쪽 약 1km지점에 넓이 약 200m길이 약 300m 정도의 용연(龍淵, 용늪→高層濕原)이 있다. 해마다 동면이나 서화면의 유지들이 제각기 그 해의 종사에 흡족한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올리고 있다. 산 개를 끌고 가서 피를 뽑아 용늪에다 뿌리고 제문을 읽는다. 또한 가뭄이 계속되는 해에도 5월말이나 6월 초순이면 기우제를 지낸다. 이 용늪은 고층습원(高層濕原 : 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습기 찬 들판)으로 경남 무쌍산과 함북의 대택, 한남 백두산의 장지(醬池), 오십리지(五十里池)와 함께 우리 나라에는 5개 처만 알려진 곳이다. 금단(禁斷) 30년간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아 각종의 희귀 생물이 풍부하여 학술적인 가치가 있어 생물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양구의 명산인 도솔산(1,148m) 이외에도 사명산(1,198m)에서도 예부터 기우제를 올린 기록이 동국여지승람 증보판(東國與地勝覽 增補版, 1530)에 ‘...산정유지천한도우(山頂有池天旱禱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설에도 용늪이 명당이라고 해서 누가 늪 속에 암장(暗葬)이라도 하면 큰비가 몹시 내리니 부근의 주민이 시체(屍體)를 파 버려야 비로소 비가 그친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정리 용수제(湧水祭)
양구에서 200여리 지점인 미수복지구(未收復地區)인 수입면 대정리에서 태평성대와 풍년을 기리는 ‘용수제(湧水祭)’라는 제의가 있었다. 대정리에는 직경20m 깊이 4m 가량의 대정(大井, 큰우물)이 있어 예부터 이 물을 농업용수로 충당하고 있어 가뭄이 있더라도 흉년을 면해 왔다. 만약 대정에서 물이 끊기면 마을에서 성곡(誠穀)을 모아 제물을 마련하여 용수제(湧水祭)를 거행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이 날부터 용수제를 지내는 그 날까지 제주는 매일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상가조문(喪家弔問)도 상가하고 침실까지 별실을 쓰고 용수지에 임한다. 용수제가 정성껏 거행되면서 수일 내에 산의 기골(氣骨)로 해서 맑은 용수도 쏟아져 나오고 자취를 감추었던 물고기도 물줄기를 따라 나오니 이 용수제는 관례적인 민속신앙으로 관념화되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용수의 보존을 위해 예부터 물고기를 잡지 않으며 목욕과 세탁을 삼가고 용수 머리로 상여가 지나가지 않도록 금기사항으로 지켜오고 있다. 이 사항에 위배되면 부정을 타서 용수가 단절되고 물고기까지 지중으로 잠입한다니 마을사람들은 용수를 신수(神水)로 여기고 있다.
가신신앙
가신(家神)은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는 공간적으로 가택에 위치하는 여러 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정 단위의 신앙이며 그 담당자는 대체로 여성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신에게 정기적으로 의례를 올리게 되는데 이를 양구 지역에서는 <안택>, <안택고사>라 한다. 가신에는 성주, 조상, 삼신, 조왕, 터주, 문신, 뒷간신 등이 있으며 이 신들은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상호간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양구지역에서도 오늘날에는 이러한 가신신앙은 많이 퇴색하고 있으며 제의 자체로 간략하게 되어서 성주, 조왕, 삼신 정도의 가신만을 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택고사
안택고사는 토지, 성주, 조왕의 3신을 제사하는 행사이다. 가족 모두는 제사일이 정해지면 모두 제계해야 한다. 양구에서는 대체로 추수가 끝나는 음력 10월에 안택고사를 올린다. 안택고사는 가족의 생기와 일진을 맞추어 길일을 골라 행사한다. 이 때에는 축문과 독경을 읽기도 하고, 무녀나 독경을 읽는 복술을 부르기도 한다. 안택일이 정하여지면 가옥 주변에 황토를 펴고 대문 위에 금색을 하게 된다. 토지신에게는 대주의 소재한 지상에서 오곡이 풍성하고 육축(肉畜)이 번성할 것을 기원하며 성주신에게는 가옥과 토목의 축조 및 가족의 안녕을 기원한다. 또 조왕신에게는 화식(火食)을 잘 보우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린다. 제물은 팥 시루떡을 주로 하며 메ㆍ갱 그리고 주과포, 어육을 올린다. 절차는 먼저 성주신에게 빌고 다음으로는 토지지신, 조왕신의 순서로 빌게 된다. 무녀와 복술이 없이 집주인이 비손할 때에는 대주의 이름과 생년을 대고 금년에도 무병장수하게 하여 주시고 농사도 잘 되매 아무 탈 없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가족 구성원들의 이름과 생년을 대면서 소지를 올린다. 금기로는 안택제의 기간에 금줄을 쳐 놓으면 가족만 출입이 가능하며 이 때, 상주, 문상, 죽은 짐승, 화재, 살생 등을 보아서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식구 가운데 부정한 사람은 제의가 끝날 때가지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친척집에서 생활해야 한다. 무녀와 복술이 제사를 올릴 때에는 대주는 계속 절을 올리고 징이나 북을 울리며 경문을 읽게 한다. 복술의 독경은 토신경(土神經), 조왕경, 성조경, 안택경, 명당경, 봉송환위경을 차례로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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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지신
토지신은 가신으로서 가옥의 집터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토지신은 ‘터주’ 또는 ‘터주대감’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토지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상을 차려 제물 그리고 토신경이라는 경을 읽어 축원한다. 양구지역에서 일정하게 토지신을 모시는 장소는 없으며 신체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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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주신
토지신은 가신으로서 가옥의 집터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토지신은 ‘터주’ 또는 ‘터주대감’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토지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상을 차려 제물 그리고 토신경이라는 경을 읽어 축원한다. 양구지역에서 일정하게 토지신을 모시는 장소는 없으며 신체 또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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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왕신
부엌에 모시는 신으로 ‘화신(火神)’ 또는 ‘부뚜막신’이라 한다. 아궁이를 관장하며 재산신에 해당한다. 이 조왕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토지신, 성주신과 함께 제를 올린다. 밖에서 음식이 들어오거나 좋은 음식을 마련하였을 때 조왕신에게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무속신앙
무속신앙은 무당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 현상이다. 무속의 신앙대상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多神)을 신봉함으로써 다양한 신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속은 현대적 차원에서 인위적 손길이 미치지 못해 원시 종교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 종교로서의 제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간신앙의 특징은 바로 이 종교로서의 체계나 조직이 없는 것에 있다 하겠다. 양구지역의 무속신앙은 강신무 계통의 무당이 주축을 이룬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만신(보살)인데, 이들은 대체로 점을 치거나 굿을 한다. 또한 이들은 점술, 신수, 사주, 궁합, 택일을 하며,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에 작은 푸닥거리를 한다. 또한 안택고사 때에 제문을 읽거나 경을 읽으며, 재수굿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마을동제 때에 무당이 있는 마을은 이들이 참여하여 소지와 함께 비손을 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구지역에 단오절날 큰 마을굿이 있었다는 기록이 성현의 서문집에 있어 주목할 만하다. 조선 중기때에 학자 성현(1439~1504)은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양구를 지나며 노래한 <제양구헌운>, <식방천역정>, <영신곡>, <송신곡> 등 4수를 그의 문집 허백당집에 남겼다. 시에 보면 이 지역의 무속적 편린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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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신 곡>
- 새벽에 젓대를 화산에서 부는데
- 단오날 성황신 집집에 내리누나.
- 다투어 바람타고 서로 전파하니.
- 검은 머리태 구름같이 모여드네
- 늙은 무당 변장한 신어 내리며
- 삽시간에 왔다갔다 동작도 빠르네
- 술 빚고 밥 지으며 평화롭게 오가며
- 으슥한 달 밤 길거리를 쏘다니네
- 빨간 꽃처럼 아름다운 청춘남여
- 우연히 서로 만나 다투어 희학하네
- 신심으로 인한 음식 취하니 즐거워
- 청조의 오색 약속 필요치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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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신 곡>
- 푸르는 운림엔 교목이 많은데
- 지량을 심어서 소옥을 둘렀네
- 북 소리는 고요한 골짜기를 울리고
- 청요와 황독을 제물로 썼네
- 서로 다투어 백곡을 비옵나니
- 음사는 해마다 성속이 되는구나
- 3일을 즐겨도 오히려 부족하여
- 호문을 향하여 실료를 감출하네
- 쓸쓸한 바람앞에 지전을 불태우니
- 깃발은 아득하여 잡을 수 없구나
- 거리에 꼬마들은 구경위해 모여들며
- 송신의 대열은 송만으로 돌아가네
- 위의 <영신곡>에는 단오의 세시와 관련하여 성황신에게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치루어 내는 축제적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송신곡>에서는 제의 목적, 3일간에 걸쳐 신을 모셔 돌려보내는 의식 등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미루어 짐작한다면 이 양구에서도 제의, 놀이, 축제의 기능을 담당했던 무속적 제의가 역사적으로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마을굿 형태의 성대한 제의는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양구지역의 민속놀이
양구의 민속놀이는 이 지역의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발달하였으며, 나름대로의 다양한 형태의 놀이가 대부분 남아 있다. 양구를 대표하는 놀이로는 돌산령 지게놀이가 있다. 이 놀이는 산간지역 민속문화의 특질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으며 유희, 오락, 예술성을 함축하고 있는 양구의 대표적 민속놀이이다. 그 밖에 협동적 유형의 민속놀이로는 기줄싸움(줄다리기), 횃불싸움, 강신놀이, 농악놀이 등이 있다. 그 밖의 개인놀이로는 윷놀이, 연날리기, 그네뛰기, 널뛰기, 달맞이 놀이, 씨름, 닭싸움(닭놀음)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닭싸움 같은 것은 양구지역 고유의 놀이로 그 흔적만 전하지만 보존할 가치가 큰 것으로 판단된다.
돌산령 지게놀이
돌산령은 현재의 동면 팔랑리에서 해안을 넘는 고개로 바위와 돌이 많아 붙여진 이름이다. 이 지역에서 화전농경을 했던 사람들은 땔감 등의 임산물을 채취하기 위하여 이 고개를 많이 이용하였으며 여기서 살던 사람들에게 지게는 매우 중요한 운반용 도구였다.
지게는 화전밭에서의 농산물과 임산물 운반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다목적으로 사용된 수백년을 농민들과 함께 하여온 가정의 필수도구였다.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는 마을 사람들이 나무를 하러 산을 오르내리며 지게를 이용하여 놀았던 재미있는 전통 민속놀이이다.
지게탑쌓기 놀이, 지게걸음놀이, 지게상여놀이, 회다지놀이, 지게싸움놀이로 구분되는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의 특색은 놀이를 통하여 장례절차에 필요한 상례를 배우는 등 교육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이 담겨있으며, 놀이에 나오는 선소리, 뒷소리의 조화로움과 경직되지 않으면서도 수직·수평의 동적인 곡선의 아름다움은 양구 돌산령 지게놀이가 전통 민속예술로서의 최고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돌산령 지게놀이의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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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마당 :지게탑 쌓기 놀이
경연단은 양쪽 마을로 나뉘어 경연장의 두 방향에서 입장을 하고 농악은 중앙에서 입장을 한다. 지게장단소리, 얼러지타령이 입장하는 동안 계속 나온다. 입장이 끝나면 산신에 대한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지게탑을 쌓고 제례와 고사소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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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마당 : 지게걸음 놀이
고사소리가 끝나면서 양편은 지게걸음놀이를 할 수 있는 대형으로 만들고 서로 편을 나누어 지게걸음으로 이동을 하여 상대방을 밀어 떨어뜨린다. 최후까지 남은 쪽이 이긴 것으로 하여 함성을 지르고 지게상여놀이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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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마당 : 지게상여놀이
지게걸음놀이가 끝나면 양편으로 다시 서로 나뉘어 지게와 지게작대기를 이용하여 지게상여를 꾸민다. 농악과 함께 주위에서 흥겹게 논다. 상여가 다 꾸며진 마을이 먼저 지게를 치켜들고 양쪽 상여가 올려지면 상여소리에 맞춰 이동을 한다. 상여꾼은 선소리와 뒷소리를 맞춰 한쪽 손은 정해진 동작을 취한다. 두 지게상여는 자를 그리며 서로 교차하면서 상여소리의 선소리와 뒷소리를 구성지게 주고받는다. 상여소리에서 불리는 뒷소리는 어러~~, 어~허어"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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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마당 : 회다지놀이
상여놀이가 끝나면 횟대를 들고 두 개의 원을 만들어 맞춰 회를 다진다. 느린소리로 시작한 회다지는 두 사람씩 횟대를 교차하며 흥겹게 다지다가 자진소리가 시작되면 횟대를 내던지고 어깨를 걸고 역동적인 동작으로 회다지를 하며 이때 뒷소리는 "에헤.호~오리 도울해야"로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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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마당 : 지게싸움놀이
회다지 놀이가 끝나면 지게상여는 "어허" 구령에 맞춰 놀이마당을 돌며 서로 기세를 올린다. 가운데서 만난 양편의 지게 상여는 서로 밀고 밀리며 힘겨루기를 한다. 어느 한편이 밀려 넘어짐으로써 지게싸움이 끝나고 이긴편은 지게상여에 사람을 태워 더욱 기세를 올리며 놀이 마당을 돌고 진편은 그 뒤를 따른다. 이로서 지게놀이는 모두 끝나고 농악대와 기수가 앞장서서 흥겨운 장단에 맞춰 지게장단을 치며 퇴장한다.
기줄싸움(줄다리기)
조선중엽 김현도(1551~1611) 양구 현감이 주민들의 대동단결과 상무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양구를 남북으로 나누어 대단위 기줄싸움을 권장한 것에 유래한다. 줄다리기는 정원 대보름날을 기해 모든 주민이 참가한 가운데 행하여졌으며 양구를 남북으로 나누어 지는 편이 판을 보수하는 부역을 전담하였음으로 줄다리기는 고조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고 협동심과 단합의 장이었다.
김현도 현감 재임 때 행하여진 줄다리기는 양구읍 상리, 남면, 동면, 해안면이 한 편이 되었고, 중리와 서부지역인 북면, 방산면, 수입면이 한편이 되었으며 그 후 기줄싸움은 계속되어 왔다. 1910년대부터는 양구 상.하리와 하남면 송우리와 하동면, 용하리의 줄다리기는 유명했다고 한다.
한때는 지는 쪽이 세금 부담, 부역등을 맡기도 하고 술을 수십말을 사기도 했다. 그 후 차츰 이 놀이는 쇠락하였으며 현재에는 양구군 축제인 양록제 그리고 동절기 민속예술축제에 면 대항의 축소된 줄다리기 모습을 볼 수가 있다.
강신놀이
양구군 방산면 송현리 어두어니마을에 김윤모라는 사람이 등매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살았다. 송현리는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솔재라고 불렀다. 돈두루, 문장골, 솔골, 안궁골, 점말, 학령골, 등매동, 어두원리, 응달마을을 총칭해서 송현리라 부른다. 어두어니 또는 어두원리는 원래부터 골짜기가 깊어 어둡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어두어니마을 서쪽에 있는 마을이 등매동이다. 등매동에는 매화 낙지형(落地形)이 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매화낙지형의 이름에서 연유되어 매나텃골이라 하기도 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타관사람들이 들고 넓고 산수가 좋은 소재마을로 모여들었다. 그중에 등매라는 외동딸을 데리고 온 김윤모라는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는 사난하여 사냥으로 생계를 이었다. 어느 해 겨울 김윤모는 사냥을 나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 등매 아가씨는 험준한 산골을 헤메었다. 어두원리 마을에서조금 떨어진 산속에는 이름없는 총각이 혼자 살고 있었다. 그 총각도 사냥을 나왔다가 산속을 헤매던 남장을 한 등매처녀를 만나게 된다. 등매처녀와 산속의 총각은 그 맹수를 잡아서 아버지의 영혼을 위로하고 원수를 갚자고 약속한다. 총각은 맹수를 잡기위해 칼을 장치한 덫인 ‘선후’를 설치해 놓고 여러날 여러달을 끈질기게 맹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등매처녀가 어두원리 마을에서 덫을 놓은 산까지 매일 가고 올때는 학이 날아와 날개 위에 태우고 날아가고 날아 오는 것이었다. 지금도 등매처녀를 학이 날개에 태우고 날아다녔다는 학령이 있고 학령고개라 불려지고 있다. 학령밑의 골짜기를 학령골, 학령고개를 홍학령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사연 때문이다. 등매처녀와산속의 총각은 가을에 접어들어 마침내 맹수를 잡았다. 등매와 산총각은 그녀의 아버지 영혼을 위로하는 제사를 올렸다. 그때까지 남장을 하고 있던 등매처녀는 산총각에게 자기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고백한다. 이리하여 등매처녀와 산총각은 사랑하게 되어 가연을 맺고 어두원리를 하직했다. 그 후부터 등매처녀가 살던 마을을 등매등, 등매처녀를 태운 학이 넘은 고개를 학령이라 불렀다. 산총각이 살던 고장을 신선이 산총각을 의로운 일을 하면서 살았다 하여 선의대라 불렀다. 마을 사람들이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잔치를 벌이는 행사를 ‘강선놀이’라 한다. 등매처녀와 산총각의 사적에서 유래된 ‘강선놀이’는 해방전까지 전해왔다. 양구군 방산면 천미리의 강신놀이는 해마다 음력 9월 그믐날에 햇곡으로 정성들여 술을 빚고 떡을 찌고 음식을 차려서 고사를 지냈다. 마을에 정자가 있는 당목인 자작나무 고목 아래 제상을 차리고 마을의 무사태평을 비는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제사가 끝나면 생산한 농산물의 값을 정하고 마을의 제정과 촌장을 선출한다. 모였던 마을사람들과 구경꾼들에게 골고루 음식을 돌리면서 하루 종일 흥겹게 잔치를 노는 민속놀이다.
윷놀이
부족국가 시대부터 전해 오는 이 놀이는 새해의 정취가 넘치는 놀이로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 계속된다. 윷은 박달나무, 밤나무, 싸리나무로 만드는 직경 3~5cm, 길이 5~20cm의 장작윷과, 또 밤윷, 종지윷 같은 두 종류의 윷이 있다. 29개의 동그라미를 그린 말판을 놓고 2~6인 때로는 더 많은 인원이 두 패로 나뉘어서 승부를 겨룬다. 이것으로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친다. 윷을 땅에 던져 나온 수의 이름은 도, 개, 걸, 윷, 모라고 부른다. 근래에 와서는 양구 지역에서는 다른 지방과 같이 세시 풍속의 놀이로서의 본뜻과는 달리 다만 오락이나 내기의 방편으로 변해서 명절에만 유행하고 있다.
연날리기
해마다 정초에 마을마다 행하던 민속놀이로 지연(紙鳶), 풍쟁(風箏), 풍연(風鳶)등으로 불려진다. 가는 대쪽을 가로 세로 얽어서 거기에 종이를 발라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인 연으로는 방패연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세로로 긴, 장방형모양을 하고 있으며, 흔히 가운데 둥근 구멍을 뚫는다. 연의 이마 가운데에는 마치 곤지를 찍은 것처럼 색종이를 붙이기도 한다. 실로 볼이 줄을 매어 공중에 날리는데 연을 높고 멀리 띄우기 위해 긴 연실을 달고, 이 연실을 그것을 감는 얼레로 풀었다 감았다 한다. 근래에는 수시로 어린이들이 연날리기를 하고 있다. 또한 동절기 양구 축제인 민속예술축제에서 강원도내 창작연 만들기와 연날리기 대회가 있어 연날리기 민속의 계승에 힘쓰고 있다.
그네뛰기
오랜 옛날부터 전래되어 오던 그네는 5월 단오와 추석날에 여성들이 즐기던 놀이이다. 평지에 높다란 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가룻대를 대어 거기에 매거나, 아니면 커다란 자연대나 당목의 높은 가지를 이용해서 두 가닥으로 동아줄을 매고 아래에 발판을 매달아 그 위에 올라서서 앞뒤로 흔들어 반 공중에 오락가락 한다. 구르는 요령에 따라 더욱 높이 올라간다. 승부는 누가 더 높이 올라가느냐로 가려지는 유희다.
널뛰기
이 놀이는 한국 고유의 것으로 음력 정월 초순 부녀자들이 즐기던 놀이이다. 두텁고 길다란 널판대의 중 가운데를 짚뭉치나 가마니 뭉치로 고아놓고 양쪽에 두 사람이 올라서서 번갈아 한 사람씩 뛰어 올랐다가 떨어지는 반동으로 상대를 위로 치켜 올린다. 지방에 따라서는 박자를 맞추기 위해 노래를 부르나 이 곳에서는 그런 노래가 전하지 않는다. 근래에 와서는 어른들이 이런 노래를 즐기는 것은 볼 수 없고, 어린 여자아이들이 간혹 노는 것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달맞이
정월 대보름날 저녁에 하던 세시 풍속의 하나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초저녁에 사람들은 뒷동산에 올라가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린다. 대보름 둥근 달이 떠오르는 것을 남보다 먼저 보아야 길하다고 해서 추위를 무릅쓰고 뒷동산에 오르는 것이다. 달이 떠오르면 들고 있던 횃불은 땅에 꽂고 두 손을 모아 절을 하며 자기의 소원을 빈다. 그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의 달빛을 보고 그 해의 풍흉을 점치기도 한다. 그리고 가지고 간 횃불을 가지고 이웃 동네 사람들과 횃불싸움을 벌린다.
횃불놀이(횃불싸움)
정월 대보름날 만월이 동녘 하늘에 서서히 솟아오르고 온 누리에 밝은 달빛이 퍼져갈 무렵에 드넓은 벌판 위 빙판 위에는 어지러히 타오르는 횃불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며 빙상야전을 벌린다. 달맞이를 끝낸 마을의 청소년들이 이웃 부락 청소년들과 어울려 벌리는 횃불싸움이다. 수숫대를 길게 몇 개를 합쳐 화심을 만들고 그것을 끈으로 묶어 긴 횃불을 만들면 두 세 시간이나 계속해서 타 들어간다. 이 횃불과 횃불이 마주쳐 얽히고 섥혀 엎치락 뒤치락하며 탄성과 비명이 천지를 진동하는 일대 수라장(수라장)이 전개된다. 이것은 단순한 놀이나 패싸움이 아니라 마을 노장자에 드리는 승전보고요, 풍년과 평화를 몰고 오는 상징인 것이다. 한중(한중)의 훈련인 동시에 유서 깊은 취락(취락)시대에 상무정신(상무정신)을 닦아 오던 이 지방 주민들의 애향적인 스포츠인 것이다. 그러나 혈기가 넘친 청소년들은 때로 그 흥이 도가 지나쳐 마을과 마을 사이의 편싸움으로 번지기도 하여 심할 때에는 살인극까지 벌어지는 수도 있었다고 한다. 1930년대까지도 곳곳에서 행해 졌으나 그 뒤로는 자연히 폐지되었다. 양구읍 상리와 남면 용하리의 횃불놀이는 그 장관으로 이름이 있다.
씨름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적인 남자 운동경기의 하나로 각희(角戱), 각희(脚戱), 각력(角力), 각저(角抵, 角觝)라고도 부른다. 넓은 마당에서 허리와 다리에 샅바를 감은 두 장정이 마주 꿇어앉아 각기 한 손으로는 상대방의 허리띠, 또 한 손으로는 샅바를 잡은 다음 심판관의 호령에 따라 동시에 일어나 먼저 상대방을 넘어뜨리므로서 승부를 결정하는 경기이다.
닭놀음(닭싸움)
남면 용하리에서 성행해 오던 놀이이다. 각 부락이 대항 일종의 닭싸움이다. 남면 용하리와 청리, 송우리, 야촌리 등에서는 해마다 정월이면 장터에서 이웃 부락들과 이 놀음을 즐겼다. 구경꾼들이 주위에 둘러앉고 가운데 공간에 닭을 몰아넣어 싸움을 붙이고 응원을 하면서 흥겨워했다. 이 놀이는 해방 직후까지 성행하다가 자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노인층에서 지금도 술내기로 장난 삼아 닭싸움놀이를 하고 있다.
양구지역의 민요
민요란 민족 스스로가 창출하고 조성한 시대상황을 정서의 비단폭으로 감싸 음악이란 형식을 빌어 나타낸 선택된 민족시가문학이다. 하기에 다른 모든 민족문화 중 으뜸으로 항상 그 민족과 함께 성장해 왔다. 종래 학계에 소개된 양구군 민요의 실태는 어떠한가. 비록 논문은 아니지만 최초로 정리된 내용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刊)《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4에 게재되어 있는데 그 전문(全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고장의 민요로는 《한국민요집》에 채집되어 있는 편수가 13편이고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 10여편 있으나, 이 가운데 《양구군지》에 수록되어 있는 민요 중에는 최근 작사되어 작사자까지 밝혀져 있는 것을 빼면 7,8편이 된다. 양구는 강원도에서도 산이 많은 벽지로 산수가 민요의 소재로 된 것이 많을 법하나, 양구의 민요로 현전하는 가사 중 두드러진 것은 산수보다는 시사적인 것이나 사상성을 지니고 있는 민요가 의외로 많다. 그 예로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싶어 입었나/소화(昭和)가 죽었다니 반몽상(半蒙喪) 입었네/…”라고 한 것은 일제에 항거하던 민중의 의식을 노래한 것이고, “개명세계 위반마라 영구종신 징역된다/깎고깎고 머리깎고 개명세계 나가보세/…”라고 한 것은 개화를 부추기는 개화의식을 노래한 것들이다. 이밖에도 이러한 유의 민요가 몇 편 더 있다.
산간 고을의 민요(民謠)가 흔히 산수의 경색이나 산과 물에 붙인 정희를 노래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양구는 강원도내에서도 시사적이거나 사상성이 잠재한 민요를 많이 부르고 있다. 양구에 이러한 민요가 많은 것은 국권상실 당시 이 고장에 의병활동이 활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여러 번 접전이 있었고, 국권상실 후에는 매동학교(梅東學校)의 항일교육과 양구 신사불경사건 등이 있어 은연중에 이 고장 사람들이 이러한 사상적인 데에 감화되었던 것이 이러한 민요로 나타나고 있다. 산수나 지명을 배경으로 한 민요로는 “돌산령 명당구비엔 술한잔 없어도/오가는 길손은 쉬어만 가네/…”의 가사로 되어 있는 <돌산령타령>이 한 편 남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양구에는 민속놀이인 줄다리기에 곁들여진 <줄다리기노래>가 있다. 양구읍 상리ㆍ하리ㆍ남면 송우리ㆍ용하리 일대에서 해마다 줄다리기를 할 때에 부르던 “이겼네 이겼네 상리가 이겼네/졌네 졌네 용하가 졌네.…”라는 가사는 줄다리기 놀이 때에 부르던 노래이다. 이 노래는 양구군에서도 이 놀이가 성행하던 여러 마을에 널리 퍼져 있다. 양구는 민중의식이 타군(他郡)과 남다른 데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홍천 어수묵이 횡성 약동이 통천 못난이 양구 순민 춘천놈의 사론 원주놈의 음흉
이라고 민요에 표기되어 있듯 순박한 인심과 서정적 민요가 없을 리 없다 근자, 김경남의 <양구 팔랑리 바랑골 농요>(《관동민속학》(제10ㆍ11합집), 관동대학교 강릉무형문화연구소, 1995)와 김진순의 <강원도지역 ‘소모는 소리’의 현장론적 연구>(《민요논집》제5호, 민요학회, 1997)에 밝혀진 바와 같이 양구지방도 다양한 <메나리소리>나 <얼러지>, <소모는 소리>등이 분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얼러지>와 <어랑타령>
양구 민요는 산악 지방의 특색 때문에 소나 말을 소재로 한 민요와 <어랑타령>과 <얼러지타령>에서 찾을 수 있다. 양구군은 한무제 원봉 2년에 설치한 임둔군(臨屯郡)의 속현이었다. 함경도를 경계로 하고 있는 접경지역인 양구군에서 <어랑타령>이 꽤 많이 불리고 있는데 이는 문화접변(文化接變)의 이론으로 해석되고 규명이 된다. 철원지방의 <허랑타령>과 양구지방의 <어랑타령>은 같은 소리이다. <어랑타령>은 함경도에서 <신고산타령>이라 부른다. 소리 후렴에 "어랑 어랑 어허야"라고 하는 말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어랑타령>이란 제목을 붙였고, 노래 사설 첫 부분에 “신고산이 우루루”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신고산타령>이라는 이칭(異稱)이 생긴 것이라고 하나 함경남도신고산에는 신파극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양구는 지정학적으로 함경도의 영향권을 벗어날 수 없다. 다른 군보다 <어랑타령>을 즐겨 부르는 소이연(所以然)도 바로 그 때문이며 <어랑타령>의 영향이 지대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동면에서 채록한 <어랑타령>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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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타령(노래 : 김덕원, 김옥희)
- 비가 올래나 눈이 올래나 억수 장마가 질래나
- 난데없는 먹구름이 모아만든다
- 산이나 높아야 굴이 깊지
- 조그만 여자의 속이 뭐 그리 깊을소냐
- 오늘 갈는지 내일 갈는지 사사망정인데
- 울밑에 봉숭아는 왜 심어놨나
- 기차야 마차야 소리를 말고 가거라
- 돈 없는 요네 마음이 또 심란하다
- 산천이 고와서 되돌아 보았나
- 나 살던 곳이니 뒤돌아 보았다
- 니가 잘났나 네가 잘났나 깽기도투하지 말고
- 한 오백년 살자는데 웬 성화냐
- 아슬 아슬 춥구서 골머리 앓는데
- 정 주신 품안이 병원보다도 났구나
- 어랑 어랑 어야 어야 데야 사랑가로만 들어라
- 절구통을 끌어안고 몰매를 맞으면 맞았지
- 술담배 아니 먹고 내가나 못 살겠구나
- 저기 저 묵밭은 작년에도 묵더니
- 올해도 날과 같이 또 묵는구나
- 바람이 불어서 날라오신 편지
- 맞바람이 부딪쳐서 답장연락 합시다
- 앞두집이나 살아도 요런 줄 저런 줄 몰랐는데
- 열 두가지 재주에 꾀꼬리 살살 녹는다
- 어랑 어랑 어랑간다 디어라 요것이 난사로다
- 어랑타령의 본고향은 함경도 원산시구요
- 와다시와 본 고향은 팔랑리입니다
- 술이라도 생길라면 매일장차 생기고
- 님이라도 생길라면 이별없이 생겨라
- 담배 담배나 할 쩍에 미도리 한 갑 사줄 걸
- 못 잊어야 죽은 인생을 내가 어떡하나
- 잘 먹고 잘 살다 죽어도 원통하다는데
- 못 입고 못 먹다 죽으면 누가 원통하다나
- 내가 좋기는 새 장구나 같고
- 말 붙임야 좋기는 장모님이 딸이라
- 술담배를 건치를 말어요
- 잘 사는 요네 시집을 왜 못 살게 하나
- 달 뜨는 동산에는 달이나 떠야 좋고
- 요네 속 달 뜬 것은 매 맞을 징조
- 아슬아슬히 춥거들랑 내 품에 들고
- 베개가 높거들랑 와다시 팔을 배어라
- 알록달록에 산모베개는 밤중이나 비지
- 와다시의 긴긴 팔을 어디 가서 대보나
-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당사주나 팔자
- 임자당신 못 만난 것은 지아비 탓이야
- 요놈의 총각아 뭐허러 왔나
- 숫돌이 좋아서 낫갈러 왔다
- 요놈의 계집애야 뭐하로 왔나
- 절구가 좋아서 쌀 실러 왔다
- 열 두 시에 오라구 우도나 몇 개 보냈더니
- 일이삼사를 몰라서 새로이 한 시에 왔구나
- 울어메 달어메 꿀베는 총각
- 눈치가 있걸랑 이 떡을 받아주라
- 우수나 경첩에 대동강이 풀어지고
- 긴밤에 윤설이 내 속이 풀어진다
- 돈이라 하면 죽는 줄을 알고
- 시누이 남편이 돈 받으라 하네
- 가자는 낭군도 열 둘이요 살자는 낭군도 열 둘이다
- 삼팔의 이십사 스물너이로구나
- 어랑 어랑 어야 어야 디야 어랑간다 디어라 요것이 난사로다
- 울 넘어 가는 것 보았나 담 넘어 가는 걸 보았나
- 옆에 집에 이도령 곁눈질 하는 걸 보았느냐
- 어랑 어랑 어야 어야 디야 요것이 난사로다
- 울타리 꺾으면 나오신다더니
- 양남채를 다 부셔도 왜 아니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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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랑타령(노래 : 염응수)
- 어랑타령 본고향은 함경도 원산이고요 우리네 본고향은 양구 동면이로다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신고향이 우르릉 화물차 떠나는 소리 고무공장 큰아기 외로와 단봇짐 싼다네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노랑저고리 앞섶에 눈물을 딸딸 흘리고 이 탓이 뉘 탓이냐 쥐아비 잡놈 탓이라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세월이 가고서 임이 망종가면 한세상 백년을 누구를 믿고 사나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세월이 갈라면 네나 혼자 가지 아뜰한 우리 청춘을 왜 데리고 가나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세월이 가기는 바람결 같고 인생이 늙기는 꿈결만 같구나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일락은 서산에 해는 뚝 떨어지고 월출은 동녘에 달 솟아온다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희고 밝은 저 달은 운무중에 놀고 너하고 나하고는 이런 좌석에서 놀자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산천이 고와서 뒤돌아를 보았나 네가 살던 고향이니 뒤돌아 보았네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 소슬 동풍엔 궂은 비 슬슬 오고 시화나 연풍에 임만 섞여 노잔다 어랑 어랑 어야 에야 데야 내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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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양구는 또 양구산천이 만든 향토민요를 보존하고 있으니 바로 <얼러지>가 그것이다. ‘아라린지 어러린지…’라고 하는 구절이 민요 소절에 있거니와 <얼러지>는 <정선아리랑>에 해당하는 <양구아리랑>이다. 그런데 <정선아리랑>이란 말보다는 <정선아라리>가 그곳 향토색 맛을 풍기듯 <양구아리랑>은 <양구아리랑>이란 명칭보다는 양구말 그대로 <양구얼러지> 내지 <양구어러리>라 해야 옳다. <양구얼러지>는 <양구메나리>와 쌍립적 관계에 있다. <양구메나리>가 주로 양구 남성들의 노래라면 <양구얼러지>는 양구 여성들이 많이 부른다. 그러나, <양구얼러지>가 꼭 여성만이 부르는 노래는 아니니, 이는 <정선아리랑>이 여성 전유물만이 아닌 사정과 흡사하다. <양구얼러지>는 노래가 <정선아라리> 와 다른 토리로 진행되기 때문에 정선과 같이 지명을 넣어 <양구얼러지> 로 명명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게 명명해야만 이종의 색깔이 다른 민요임이 드러나 변별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동면에서 조사한 <양구얼러지> 10여 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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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러지 타령(노래 : 김덕원, 김옥희)
- 바랑골 뒷동산에 머루 다래가 떨거든 우리나 삼동서 머루 따러 가자
- 바랑골 뒷동산에 더덕살이 나거든 우리나 삼동서 더덕 캐러 가자
- 앞집 총각아 낫 갈아라 바랑골 뒷동산으로 갈 꺾으로 가자
- 돌산령 달산령 선질꾼이 떴다 재작정 애기 갈보야 술 걸러 놔라
- 대바위 용늪에 얼러지가 나거든 너하고 나하고 얼러지 캐러 가자
- 노란두 대가리 뒤범벅 상투 언제나 길러서 내 낭군을 삼나
- 요년의 계집애야 그 말도 말어라 이십 년 안쪽에 내 낭군이 될라
- 저걸 길렀다 낭군을 삼느니 솔씨를 뿌렸다 정자를 삼지
- 돌산령 샛바람이 휘몰아치니 심곡사 풍경소리가 요란도 하다
- 바랑골 샛바람이 휘몰아치니 황금 같이 익은 곡식 다 떨어진다
- 일본에 동경이 얼마나 좋아 꽃 같은 나를 두고 연락선을 타나
- 바랑골 밭가는 소리가 처량도 한데 오고가는 행객들이 머물러진다
- 아서라 말어라 네 그리를 말어라 사람의 괄세를 네 그리나 말어라
- 인생이 났구서 금전이나 났는데 인생은 모르고 금전만 아네
- 천천이 부르족족 다 가시던 낭군 백설이 휘날려도 왜 아니오나
- 머루 다래 떨어진 것은 꼭지가 있지 부모동생 떨어진 것은 꼭지조차 없네
- 놀다가 죽어도 원통 하다는데 땅만 파다가 죽은 요내 몸 얼마나 불쌍한가
밭갈이 소리
양구는 화전을 일구어 생업을 삼던 곳이 많다. 그러므로 밭갈이 소리는 화전을 일구던 생업 현장소리라 할 수 있다. 소 한마리로도 부족하여 소 두 마리를 끌며 부렸던 쌍겨리 소리는 차츰 화석화 되어가고 있어 개발해야 할 소리유산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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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랴 어-어디 어냐
- 이랴 마랴
- 제일 차고 세찬 논 슬슬이 가자 어냐
- 어 어디 농부일생 한 일은 널과 널과 말이로다
- 아냐에 이후우 돌구 돌아 감돌고 풀돌고 가자
- 어 어디 저 안소 헐허리 가자
- 오늘 해도 중낮인데 배도 고프고 다리두 아파
- 헐허리 가자 어서 빨리 가자
- 저 안소 헐허리 돌 돌게 야뇨우 어드루 후우
- 감돌고 풀돌아 헐허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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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타령
- 춘천이라 샘밭장 신발이 젖어 못보고
- 홍천이라 구만리장 길이 멀어 못보고
- 이귀저귀 양구장 당나귀 많아 못보고
- 한자두자 삼척장 배가 많아 못보고
- 지금 왔다 인제장 안 바빠서 못보고
- 안창 곱창 평창장 술국 좋아 못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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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민요(1)
- 인제남박장사 양구말군
- 화천떼군 춘천 월급장이
- 홍천토막장사 정선갈보
- 영월담배장사 회양며리치장사
- 삼척 베장사 강능 감장사
- 고성 어부 철원 명주장사
- 횡성 장돌뱅이 원주 술장사
- 통천 쌀장사 평강 콩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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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민요(2)
- 간성놈의 떠돌기
- 고성놈의 헛더운체
- 홍천어수록이
- 횡성약동이
- 통천못난이
- 양구 순민(順民)
- 인제 우민(愚民)
- 화천 완민(頑民)
- 춘천놈의 사론(士論)
- 원주놈의 음흉(陰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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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틀요
- 하늘잡아 베를 놓고 구름잡아 잉에 걸고
- 함병나무 복바디에 왜격젝격 짜고 보니
- 잉앳대는 삼형제요 놀림대는 독신이라
- 끌신대는 등이 굽고 두루마리 허리 짤룩
- 섬섬옥수 북 던지니 꾀꼬리가 오락가락
- 한치 짜고 두치 짜니 하루만에 한필일세
- 이베짜서 무엇하나 고은 새수 골라다가
- 나무 가신 서방님의 중이적삼 마련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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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천황(召和天皇) 반몽상가(半夢喪歌)
-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싶어 입었나
- 소화가 죽었다니 반몽상 입었네
- 일본은 폭격으로 잿더미 되었는데
- 왜놈은 어이하여 기세만 올리느냐
- 흰저고리 검정치마 입고 싶어 입었나
- 소화가 죽었다니 반몽상 입었네
- 일본은 패망하고 왜놈은 도망치는데
- 징용가신 내낭군님 언제나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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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산령 타령
- 세월인지야
- 봄 한철인지
- 나는 몰랐더니
- 명당구비 살구꽃이
- 날 알아주네
- 무게산 골짜기
- 모시대 참나물은
- 시부모 밥반찬 감이로다
- 울너머 담너머
- 팔 베는 총각
- 눈치가 있었으면
- 떡 받아 가세
- 느리니 골짜기
- 열너리 나물
- 눈속에서도 꽃이 피네
- 왜 갈려나 왜 갈려나
- 왜 가려오
- 꽃같은 나를 두고
- 왜 가리오
- 대미러니
- 노리대 돋거든
- 너하구 나하구
- 단둘이 가세
- 돌산령 명당구비엔
- 술 한잔 없어도
- 오고 가는 길 손은
- 쉬어만 가네
- 문바위 용늪
- 참나물 우거진 곳에
- 우리 나 삼동세
- 나물가세
- 청춘에 할 일 없어
- 주색청루(酒色淸樓)에
- 몸 바쳐 사나
- 님이라고 하는 것은
- 다 남이건만
- 밥먹다 졸려도
- 꿈에 뵈네
- 세월이 갈려면
- 너 혼자 가지
- 알뜰한 청춘은
- 왜 데려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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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춘(含春) 나루터 - 작사ㆍ작곡 손사용(孫士龍 1910~1951)
- 楊口江 강언덕 버들잎 피면
- 강남간 제비들은 돌아 오건만
- 한번 간 옛사람은 찾을 길 없어
- 외로히 눈물짓는 함춘 나루터
- 당신이 놀던배는 가고 오건만
- 초생달 어린밤에 두견이 되어
- 가신 곳 어데이며 무슨 소관에
- 사랑을 던져주고 아니 오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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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요
- 연아 연아 올라라
- 하늘높이 올라라
- 구름까지 올라라
- 연아연아 올라라
- 하늘높이 올라라
- 만월(滿月)까지 올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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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요(情謠)
- 세월인지 봄철인지
- 나는 몰랐네
- 뒷동산에 살구꽃이
- 나를 알려주네
- 우근산령 도산령(兜山嶺)
- 넘나드는 손님
- 눈치가 있거든
- 떡받아 가시오
- 느진이 무게골
- 모시대 참나물
- 우거진 곳에
- 우리 나 삼동새 나물가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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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행진곡 - 작사ㆍ작곡 염석정(廉錫鼎)
- 금강산은 뜻있게 남에 뻗히고
- 돌산령은 동편에 믿는 성(城)되고
- 사명산(四名山)은 서편에 희망봉 이뤄
- 남북간에 내려 돋힌 우리 양구라
- 월명고개 넘어 온 옥토끼님
- 비봉산에 올라 오는 금거북님
- 가시고 오시는 많은 세월에
- 부중에 영고성쇠 변화 많구나
- 일곱면에 생활하는 우리 동포야
- 산고수려 우리고장 이상적으로
- 꽃을 심고 물을 주어 낙원 만들자
- 천년만년 살고지고 양구 내사랑
- 내사랑 내사랑 내사랑 내사랑
- 아름다운 내사랑 양구라
- 사노라 사노라 사노라 사노라
- 나는 너를 위하여 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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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산(兜率山)의 노래 - 작사 이덕근 작곡 한상기
- 하늘에 우뢰소리 땅위에 아우성
- 불바다 피투성이 싸우기 몇밤
- 이나라 해병들이 명예 걸메고
- 목숨받친 싸움터 도솔산일세
- 아침안개 속으로 햇살을 받으며
- 돌가루 먼지속에 그리던 긴밤
- 땀투성이 얼굴을 들어 볼 때엔
- 도솔산 고지고지 발아래 있네
- 돌바위 벼랑에도 골짜기에도
- 손발의 피땀으로 아로 새겨진
- 해병대의 그 이름 가실리 없어
- 세상사람 일러와 도솔산 싸움
- 오오 도솔산 높은 봉
- 해병대 쌓올린 승리의 산
- 오늘도 젊은피 불길을 뿜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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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다리기(索戰)의 노래
- 이겼네 이겼네 上里가 이겼네
- 졌네 졌네 龍下가 졌네
- 이길려고 내려 왔던 용하청년들
- 어찌하여 지고 가는가
- 내년 요때나 만나나 보세
- 이겼네 이겼네 용하가 이겼네
- 졌네 졌네 상리가 졌네
- 이길려고 내려 왔던 함춘청년들
- 어찌하여 지고 가는가
- 내년 요때나 만나나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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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향교(楊口鄕校) 교가 - 작사 류재정(劉載釘 1920~1979)
- 비봉산(비봉산) 영봉아래 그윽한 곳에
- 대성전을 높이 세워 성현 모시고
- 유전을 추모하는 장엄한 향교
- 파로호 은빛파도 서기 비치는
- 명륜당 넓은 뜰에 선비 모여서
- 경륜을 익혀가는 우람한 향교
- 사명산 정기어린 우리향교는
- 자고로 효제충신 전하여지고
- 천추만세 또 전할 그 터전일세
- (참고자료 : 양구민속지, 양구군지, 양구의 지명)
양구지역의 세시풍속
세시풍속은 달의 주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영어로도 claender festival, cyclical rite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곧 일년 단위로 돌아오는 주기적 전승물인 명절이나 풍속을 지칭한다. 그리하여 연중행사(年中行事), 세시(歲時), 세령(歲令), 세사(歲事), 절령(節令), 월령(月令), 시령(時令)이라 불렀던 것이다. 세는 ‘해’나 ‘수확’을 뜻하며 령은 율령을 뜻한다. 과거에는 계절마다 왕이 우주의 이치를 따라야 할 준칙이나 농경신에 대한 복종을 명한 것을 시령이라 하였다. 백성뿐 아니라 왕후장상도 이처럼 하늘의 율령을 따랐으니 세시풍속의 역사는 요원하다 하겠다. 역사적으로 볼때 자생적 한국 세시풍속은 무속적 농경의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와 생업활동과 자연환경에 따라 북방으로부터 밀려들어온 세시풍속으로 채창조해 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세시풍속은 다층적 습합문화를 이루고 있으나 단일민족이라는 공통된 삶의 체계와 언어 생활로 인하여 거의 유사한 세시 풍속을 보유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환경과 주민들이 만든 지역문화특소 때문에 색다른 양구만의 풍속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정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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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초하룻날은 1년중 가장 중요한 명절날이다. 이날은 가족이 모두 일찍 일어나 세장(歲粧)이라 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새 옷을 입고 세찬(歲饌)을 차려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는 조부모, 부모에 절하고 친척과 이웃 어른을 찾아 가서 세배를 한다. 세배하러 온 어른에게는 세찬이라 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세주(歲酒)도 내놓는다. 아이들에게는 약간의 세배돈 또는 떡과 과일 같은 것을 준다. 또 가정 형편에 따라 초청한 어른이 불참할 때는 세주를 보내는 일도 있다. 초하룻날은 ‘닭날’이라 하여 닭을 그려 문에 붙이는 풍속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또 덕담이라 하여 세배를 할 때나 새해에 어른 또는 친구를 만났을 때 ‘과세 안녕하셨습니까?’, ‘올해는 소원 성취 시키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부디 승진하시오’, ‘생남(득남) 하시오’, ‘돈을 많이 버시오’ 하는 등 축하의 말을 한다. 해가 바뀐 정월 초하룻날에는 또한 1년 내 어느 날이고 탈 없이 지내게 하여 주십사 하는 뜻으로 1년 360일의 처음되는 이날을 극진 조심하고 지낸다. 또 농사를 생활의 근본으로 소중히 하는 마음에서 1년내 농사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축원을 정월 초승에 행한다. 이 날을 통틀어 ‘설’이라 하고 한문으로 신일(愼日)이라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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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 대보름(上元)
정월 보름날은 대보름이라 하여 밤에는 온 동네가 모여서 갖가지 놀이를 한다. 열 나흔날을 말한다. 또 여름에 더위 먹지 말라고 취나물 복쌈을 해먹고, 부럼을 깨물고, 귀밝이술을 마신다. 보름전 5일에 옥수수, 강냉이, 콩을 볶아서 말을 하지 않고 먹으면 부럼이 나지 않는다. 만일 말을 하면 그해 감기가 잦아진다. 오곡밥을 먹고 아침에 친구집에 가서 더위를 판다. 맨 먼저 만난 이에게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날은 그 해의 운을 점치는 의미로 특히 소중히 여긴다. 이날은 좋은 음식으로 찹쌀을 쪄서 대추, 밤, 기름, 꿀, 간장 등을 약밥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1년 열 두달 무사태평하고 “부스럼, 뾰두라지 하나 나지 마십사”하고 축사한다. 이날 콩을 볶아서 아침에 부스럼 깨면 일년 내내 모기에게 안 깨물리게 된다고 믿고 있다. 이날 달이 밝고 희미함에 따라, 공기가 맑고 흐림에 따라, 풍세가 좋고 사나움에 따라 1년 동안의 수한(水旱)과 풍흉(豊凶) 등 일년 내 모든 길흉을 판단하는 풍습이 양구지방에도 남아있다. 화적(禾積)이라 하여 보름 전날 짚을 묶어 깃대 모양으로 만들어 집 길에 세우고 새끼를 늘어뜨려 고정시킨다. 또 정월 초하룻날부터 15일까지의 유희로서는 남자는 ‘연날리기’ 여자는 ‘널뛰기’를 하며 남녀가 서로 모여 ‘윷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이밖에 ‘가락지놀이’, ‘종지놀이’를 하여 ‘볼기 낮기나 깎데기 벗기기’ 놀이를 하였다. 그 밖에 장평과 현리에서는 편을 짜서 ‘횃불놀이’,‘편쌈(石戰)’도 했으나 편쌈은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다. 음력 16일은 귀신날이라고 해서 신발을 모두 들여놓는다. 또 채를 문턱에 걸어 놓으면 귀신이 그 구멍을 세느라고 날이 샌다. 또 귀신이 못 들어오게 하기 위해 대문 밖에다 목화씨와 고추씨를 모아 놓고 태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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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일반 민가, 시장, 상점 등에서는 모두 봉축이라 하여 종이를 잘라서 춘련(春聯)을 붙이고 송축한다. 입춘날에는 봄에 합당한 문자를 써서 문에 붙인다. 여염집 기둥이나 문설주에는 ‘이화백설향(梨花白雪香)’, ‘입춘대길(立春大吉)’, ‘거천재(去千災)’, ‘건양다경(建陽多慶)’, ‘사방무일사(四方無一事)’, ‘호납동서남북재(戶納東西南北財)’, ‘춘도문전증부귀(春到門前增富貴)’와 같은 단어로 된 첩자(帖子)를 붙인다. 그 밖에 명인(名人)의 시(詩)나 사(詞)를 써서 축복하는 뜻을 나타내기도 하나 오늘날 양구에서는 일반적으로 희소한 편이다.
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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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루
초하룻날은 1년중 대소제일로서 집안의 안팎을 깨끗하게 청소한다. 온갖 부정물(不淨物) 및 ‘노래기’, ‘바퀴벌레’와 같은 악충을 쫒기 위한 방법으로 ‘향랑각씨속거천리(香娘閣氏速去千里)’라고 하는 축문을 써서 천정 또는 처마 밑에 붙이기도 한다. 또 솔잎사귀를 처마 지붕에 꽂아 넣기도 한다. 이날은 정월 보름날 세웠던 벼장대(禾竿)와 곡식을 뜯어 내려서 떡을 만들어 먹는데 이 떡을 ‘솔떡’이라 일컫는다. 또 머슴 일꾼들에게 나이 수대로 떡을 먹이는데 양구 관내 방산에서는 아직도 성행하고 있다. 농사일이 이때부터 시작되므로 2월 초하루도 본래 큰 명절이었던 것이나 차츰 없어져 가고 있다.
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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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짇날
진달래꽃으로 떡, 국수, 술을 만들어 들놀이를 하고 아낙네들은 물맞이를 시작한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는 날이라 하여 묵은 제비집을 정성껏 손질해 주는 가정도 있다. 양구 관내 방산에서는 진달래꽃을 따서 잘 씻어 물기를 말린 후 재워서 설탕을 겹겹으로 넣어 술을 빚어 담근다. 새로 담근 이 술은 ‘두견주’라 하여 오래 전부터 학생들이 스승님께 대접하는 풍습이 내려오고 있다. 이날은 여자들의 들놀이인 화전(花煎)놀이가 성행한다. 마른 나무 가지에는 새싹이 돋고 산과 들에는 푸르고 붉은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진달래꽃을 뜯어다가 쌀가루를 반죽해 참기름을 발라가면서 둥글게 지져 먹었는데 이것을 ‘화전’이라 한다. 꽃이 필 때는 ‘꽃놀이’고 잎이 필 때는 ‘잎놀이’라 하였다. 경로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60세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하여 지역사회 번영회에서 자금을 각출하여 경로잔치를 베풀어 성황을 이루고 있다. 강릉의 ‘청춘경로회’와 유사한 풍습이라 하겠다. 또 아침에 일찍 일어나 쌀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 바위에 놓고 산치성을 드리기도 한다.
한식(寒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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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을 전후해서 한식이 있는데 동지 후 105일째 되는 날이다. 이날은 산소에 올라가 사초하고 제사를 올리는데 설날, 단오, 추석과 함께 큰 명절로 쳤다. 술, 과일, 포, 식혜, 떡, 탕, 적 등의 음식으로 제사를 드리는데 이것을 절사(節祀, 명절제사)라 한다. 집안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양구지방은 한식과 추석이 가장 성하다. 농가에서는 이날부터 채마전(菜麻田)에 씨를 뿌리기 시작한다.
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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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파일(初八日)
4월 초파일은 부처님이 오신 날로서 ‘욕불일(浴佛日)’이라 부르며 사녀(士女)들은 새 옷을 바꿔 입고 인근의 사찰로 간다. 관내 의선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에서는 큰 재를 올리고 각전(各殿)에 등을 켠다. 가지각색의 현란한 등을 만들어 각 가정에 달고 불교신도들이 그 고을의 시가를 일주행진 하는 등 관등놀이를 한다. 등의 모양은 상징에 따라 ‘수박’, ‘연꽃’, ‘칠성(七星)’, ‘마늘’ 등등 다양하다. 등 안에 밝은 초를 켜서 하늘의 성월과 더불어 빛을 다투게 하여 모두의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불교신도 가정은 형편에 따라 자녀수대로 등을 만들어 달고 컴컴하던 밤이 이날만은 환한 옷을 입게 하는데 9일에 가서야 그친다.
오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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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端午)
각 가정에서는 단오 차례라 하여 이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갖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제사를 올린다. 남녀가 모두 새 옷을 갈아입고 서로 모여 즐기는 놀이를 한다. 남자들은 ‘씨름’ 여자들은 ‘그네뛰기’를 한다. 음양철학에서 5월 5일은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때가 되므로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하여 특별히 이날을 숭상하고 있다. 쑥, 창포 같은 양기 돕는 풀을 뜯어다가 물을 끓여 머리를 감고 창포뿌리를 잘 씻어 ‘비녀’를 만들어 거기다 ‘수복(壽福)’이란 두 자를 새기고 그 끝에 연지를 발라서 머리에 꽂는 풍속이 이어 왔다. 인월(寅月)이라 하여 5월이 오월(午月)로 되고, 옛날에는 정월을 ‘오(五)와 오(午)’를 통용했다. 5월뿐 아니라 5일도 오일(午日)이라 일컬었다. 단자(端字)는 처음이란 말인데 단오(端午)라 함은 곧 초오(初午)일의 뜻이다. 가정에 따라 송편, 쑥떡, 취떡을 해 먹기도 하고 쑥과 익모초를 뜯어다 볕에 말려 약으로 쓴다. 양구문화원에서는 해마다 ‘씨름’, ‘그네뛰기’ 등 민속놀이를 개최하여 성황을 이룬다.
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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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두(流頭)
15일은 유두일이라 한다. 해마다 이날은 몸에 부정한 것을 떨쳐 버리려 깨끗한 물 있는 곳을 찾아가 머리를 감든지 몸을 씻는다. 이것을 떨어 버려야만 마음이 시원하고 그렇지 아니하면 께름직하여 견디지 못한다. 이것이 유두라는 놀이이다. 유두라는 글자를 쓰고 머리만 감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을 씻는다. 마을에 따라 ‘유두잔치’라는 것도 있다. 주식(酒食)을 준비, 산 좋고 물 좋은 경치를 찾아 시를 읊고 종일 즐기기도 한다. 이날 적을 부쳐서 ‘밭산제’, ‘논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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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三伏)
하지 후 제3의 경일(경일)을 초복, 제4의 경일을 중복, 입추 후 초경을 말복이라고 한다. 육개장이나 또는 개를 잡아 국을 끓여 양기를 돕고 팥죽으로 여역(癘疫)을 예방한다. 개장에 고춧가루를 타고 밥을 말아 절식으로 먹는다. 이렇게 땀을 흘리면 더위를 물리치고 허한 것을 보충할 수가 있다. 양구에서는 어느 마을이나 개를 잡든지 보신탕집을 찾아 서식하는 풍습은 아직도 성하다. 또 검무정골 같은 물터에 가서 사나흘씩 머리를 감고 미역을 감는데 닭고기나 개고기를 먹으면 해를 입어 금기가 강하다.
칠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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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석(七夕)
7일은 칠석(七夕)이라 한다. 이날 저녁 미혼여자는 견우와 직녀 두 별을 보고 절하여 바느질 잘 하게 되기를 빈다. 가정에 따라 옷을 햇볕에 말리기도 했으나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칠석날 일부 신도들은 절간에 가서 불공을 드린다. 농가에서는 기름 지지미를 하여 논이나 밭둑에 놓아 두어 해충을 물리치기도 하였다. 민가에서는 적을 부쳐 먹는다. 양력 8월쯤 호미씨세가 있는데 김매기를 잘해서 풍년이 들면 기뻐서 여인들이 보리막걸리에 부침개를 해서 먹고 논다.
팔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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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秋夕)
15일은 온갖 곡식과 과일이 익을 때인 만큼 모든 정황이 풍성한 때이며 중추가절이다. 그러므로 명일(名日) 가운데 제일로 치며 이날을 8월 가위라 부른다. 곡식이 익고 과실이 살찌고 채소가 풍성한데 날씨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때이다. 이날은 아무리 가난한 집이라도 온갖 제물을 차려 조상의 산소에 성묘한다. 먼 곳에 가 있는 식구도 추석날만은 고향을 찾아 성묘한다.
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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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일(重九日)
중구일은 5월 5일과 같이 양수가 겹치기 때문에 명일이다. 9월 9일은 일년 중 마지막 양수가 겹치는 날이라는 의미에서 특별히 숭상하여 왔다. 제비가 돌아간다는 날이다. 국화가 이때 한창 피는 때라 국화전(菊花煎)도 등장한다. 또 양구지역에서는 조상에 차례를 올리고 사람마다 고을의 진산(鎭山)이나 이름 있는 사명산, 봉화산등을 찾는다. 그리고 이 날 마을 제의를 올리는 곳이 많이 있다.
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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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午日)
팥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외양간에 갖다 놓고 신에게 기도하여 말의 건강을 빌었다. 어느 지방에 못지않게 예부터 양구는 말꾼으로 이름났으나 지금은 자취를 감추었다. 때문에 오일을 ‘말날’이라고도 한다. 시월 상달이므로 차사를 드린다. 시안답이 있어 땅을 주면 그 집에서 시안상을 차려낸다. 오늘은 누구 내일은 누구 이렇게 집안끼리 다니면서 산에 가서 묘소 앞에서 놀았다. (방산면 송현리 안동은씨 집안에서는 하루에 다 끝내자해서 시월 보름날 하기도 한다.)
십일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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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冬至)
동짓날이라고 부르는데 동지일은 양력으로 대개 12월 22일경에 해당한다. 이날은 팥죽을 쑤어 먹는데 찹쌀가루로 새알만큼 빚어서 넣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낸다. 애동지(초동지), 중동지, 노동지(늦동지)가 있다. 하지부터 차차 짧아지던 해가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소생하여 길어지기 시작하는 때가 동짓날이다. 이날 어떤 가정에서는 팥죽 국물을 문짝에 뿌려 상서롭지 못한 것을 제거하기도 한다. 악귀는 붉은 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새해 달력을 친척, 이웃집 친구 또는 거래처 손님들에게 나누어 준다.
십이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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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除夕)
보통 ‘섣달’이라고 부르는데 세제(歲除), 세진(歲盡), 제일(除日)이라고 한다. 이날은 마루 행랑, 문, 부엌, 변소 등에 모두 등불을 밤새도록 켜놓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닭이 울 때까지 자지 않았다. 최근에는 일부 가정만 마루, 변소에 한해 등불을 밝히는 걸 볼 수 있다. 양구에서는 이날 ‘문풍갈이’라 하여 성묘하는 집도 있다.
윤달(潤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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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달이라고 하며수의를 짓고, 집을 고치거나 수리하거나 새로 지으면 좋다. 이 날은 방추를 보고 할 것도 없다. 윤달에 관한 속신은 양구 또한 다른 지방과 동일하다.
양구의 민속
- 1. 의식주생활
- 2. 세시풍속
- 3. 일상의례
- 4. 민간신앙
- 5. 민속놀이
- 6. 전설
- 7. 민요(참고자료 : 양구민속지)
양구지역의 의식주생활
양구지역은 강원도 산간 지역으로 겨울철 추위에 대비한 의생활이 형성되었으며, 예전에는 모든 옷을 대부분 자급자족 했다. 목화를 심어 무명을 짜서 옷을 해 입었으며 겨울철 방한용으로 솜을 사용했다. 그리고 삼을 재배해 베를 짜서 입었으며, 누에를 쳐서 명주로 옷을 해 입었다. 특히 양구에서 누에는 일제시대 이후 활발히 재배하였으며, 60년대~70년대 초에 와서 절정을 이루다가 쇠퇴하였다. 옷은 의례복과 일상복, 노동복 등으로 나뉜다. 의례복은 특별한 의식 때 입는 일회성 내지 단기간에 착용하는 옷이다. 일상복과 노동복이 구별되기도 하지만, 같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혼례복은 마을마다 구비되어 있어 빌려서 사용한다. 그러나 여유 있는 집에서는 새로 만들어 입기도 한다. 평상복은 4계절이 뚜렷하여 계절에 따라 달리 착용한다. 여름옷은 모시나 삼베를 이용하였다. 겨울에는 명주나 무명을 겹으로 해서 솜옷을 해 입었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솜이나 털로 만든 손토수를 끼고, 머리ㆍ귀ㆍ굴에는 방한 용구를 써서 추위를 막았다. 남자는 바지, 저고리가 일상적이다. 특히 겨울철에는 솜바지에 겹저고리를 입었으며, 봄가을에는 누비저고리를 입었다. 특히 겨울철에 추위를 막기 위해 손에 착용하는 손토수는 사각형의 형태로, 솜을 안에 두고 겹으로 만든 솜토수가 있고, 동물의 털가죽을 안에 댄 털토수가 있다. 겨울철 추위가 강한 양구지방에서는 솜을 넣은 손토수를 많이 착용하였다. 그리고 감발을 착용해 추위를 막고 뱀에 물리는 것이나 상처를 방지하였다. 또한 버선이나 행전도 사용했다. 그러나 60년대 이후 서양식 의복이 들어오면서 토수와 행전은 거의 착용하지 않게 되었으며, 버선도 양말로 거의 대체되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한복으로 치마ㆍ저고리 차림이었으며, 속에 단속곳을 입었다. 활동하기 좋게 항아리치마를 입기도 했으며, 일제시대 이후 일을 할 때에 몸빼를 입기 시작했다. 여유 있는 부인네들은 집에서는 회장저고리, 남색치마, 두루마기를 착용하였다. 아이들은 바지통이 좁은 십자바지를 입었다. 신은 일제시대에는 대부분 짚신과 미투리, 게다를 신었다. 겨울철에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신발에 덧되어 신는 설피가 널리 사용되었다. 50~60년대를 거치면서 점차 수명이 오래가고 간편하며, 물이나 추위에 효과적인 고무신, 운동화가 보급되어, 기존의 신을 대체하였다. 그리고 남성들은 외출시 구두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식생활
양구지역은 산간지역으로 주로 밭농사 지역이 많다. 따라서 주민들은 주로 잡곡과 채소류, 산에서 채취하는 나물류를 식용으로 사용하였다. 이곳은 일부 평야지대를 제외하고는 쌀이 귀한 지역이었다. 특히 10여년전까지 쌀에 잡곡을 섞어 먹었으며 예전에는 옥수수나 감자, 그리고 잡곡밥을 주로 먹었다. 잡곡 중에서 보리, 조, 기장, 콩, 팥, 메밀 등을 많이 재배하였다. 일상음식은 밥, 김치, 장류, 기타 반찬류가 있으며, 특별음식은 떡, 술, 의례음식 그리고 특별한 세시에 먹는 세시음식, 계절에 관계없이 먹는 비세시음식으로 나눌 수도 있다. 음식을 세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설날에 음식은 만둣국이 가장 일반적이며, 떡국을 준비하기도 한다. 특히 나물로 무나물, 취비나물, 녹두나물, 고사리, 숙주나물, 콩나물을 해 먹는다. 정월보름에는 만둣국에 오곡밥을 먹는다. 오곡밥을 먹음으로써 오곡이 풍성하고 뱃길이 안전하다고 믿는다. 봄철에는 나물이 풍성하다. 봄나물에는 잔디싹, 삽추싹, 나물취, 모시대, 미나리싹, 곰취, 참나물, 고사리, 고비나물, 데침이나물, 미나리나물, 두릅나물, 취나물, 민들레 등 다양하다. 메주는 10월에 3월에 쑤어서 장을 담근다. 정월이나 2월에 담글 수도 있으며, 앞당겨 담글 때에는 소금을 적게 넣고 싱겁게 담그며, 3월에는 짜게 담근다. 특히 양구에서는 막장을 꼭 담아서 먹는다. 이곳에서 단오의 일반적 음식으로 취자떡이 등장한다. 떡취에 쑥과 찹쌀을 섞어 만든 떡으로 단오의 별미이다. 그리고 메밀부침개도 이 때에 해 먹는다. 복날에는 고기를 먹거나 감자전이나 감자부침개를 먹는다. 여름에는 감자와 강낭콩을 넣은 밥을 먹고, 호박도 일상화된 음식이다. 추석에는 송편을 하지만, 쌀이 부족한 집에서는 밑에 옥수수와 조를 넣고, 그 위에 쌀을 살짝 얹은 뚜껑밥을 해 먹었다. 가을에는 아욱국이 일품이며, 9월중에는 밥과 반찬을 넣어 만든 타조밥을 먹었다. 김장은 대개 입동(11월 7일경) 전후에 담근다. 김장을 반양식이라 하여, 겨울철 양식으로 중요시하였다. 젓갈로는 새우젓이 가장 많이 쓰였고, 김장으로 김치, 동치미, 깎두기, 배추소백이 등을 담갔다. 이 지역의 술은 옥수수술이 가장 일반적이다. 한편 찹쌀이나 멥쌀, 밀을 이용해 술을 담그기도 하였다. 그 외에 송이술, 솔잎술, 진달래술, 오미자술 등도 담근다. 또한 이곳에서는 옥수수와 감자를 이용한 다양한 음식이 등장한다. 옥수수를 이용해 올챙이묵이나 올챙이국수 등을 해 먹었다. 감자로는 통감자를 찌거나 구어 먹기도 하지만 갈아서 감자전, 감자떡, 감자수제비 등을 해 먹었다. 또한 도토리묵, 메밀로 부친 총떡과 메밀국수 등도 해 먹었다. 한편 칡을 캐다 전분으로 만든 칡떡, 그 외에 칡술, 칡차 등이 있다. 더덕을 구어 먹거나 가루로 만들어 밥에 섞어 먹었으며, 버섯으로 국을 끓이거나 양념해서 먹었다. 그리고 도라지 껍질을 벗겨서 삶거나 말려서 가루를 만들어 밥에 섞어 먹기도 하였다.
주생활
양구의 가옥 구조는 전형적인 산촌 가옥 구조가 많으며, 일부에서는 논농사 지역의 가옥구조를 나타내기도 한다. 예전에 가옥은 초가집, 귀틀집, 움집, 기와집의 형태였다. 그러나 해방 후 38이북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있다가 6.25때 격전지가 되면서 대부분의 집이 파괴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가옥이 남아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특히 70년대에 새마을사업으로 주택 개량사업이 추진되면서 기존의 집도 새로 개축 및 신축되었다. 가장 일반적인 집은 초가집이다. 초가 지붕은 가을에 수확을 한 후에 겨우내 틈틈이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서 봄철에 새로 이었다. 양구지역은 산간지역으로 나무가 많기 때문에 예전에는 귀틀집, 너와집, 굴피집이 많았으며, 그 외에 돌능애집, 저릅집, 샛집등의 형태도 있었다. 또한 이 지역은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눈을 빨리 치우기 위해 대체로 처마가 낮은 편이다. 귀틀집은 통나무의 뿌리와 가지를 쳐서 쌓아올린 다음 위쪽에 통나무를 얹고 지붕은 너스레 위에 저릅이나 밀짚을 깔고 위에 짚을 편 형태이다. 지금은 대부분 스레이트 지붕으로 개조되었다. 이 집은 외풍이 없고, 방안에 조명을 위한 관솔불을 태우던 ‘코클’이 있었다. 너와집은 적송이나 전나무를 쪼개어 만든 널빤지를 비가 새지 않을 만큼 지붕에 펴놓고 위에 돌로 눌러 놓은 형태이다. 풀과 이끼가 끼지 않아 100년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집이다. 굴피집은 5년이상의 참나무껍질을 벗겨 지붕에 입혀놓고 장대로 건네고 돌로 눌러 놓은 집이다. 한번 굴피를 올리면 10년은 버틴다. 돌능애집은 점판암 바위를 눌러 얇게 벗겨내서 지붕에 얹은 집이다. 또한 저릅집(겨릅집)은 삼베의 원료인 대마 껍질을 벗기고 난 후의 속대궁이인 ‘저릅’을 이엉으로 엮어 지붕으로 얹은 집으로, 수명은 약 3년이다. 샛집은 억새풀을 이엉으로 엮어서 지붕을 올린 집이다. 이런 다양한 집은 급격하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 모두 소멸하고 지금은 스레이트, 기와, 양옥집으로 단순화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볏짚, 통나무, 적송나무, 전나무, 참나무껍질, 점판암 바위, 대마 속대궁이, 억새 등의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여 자연친화적인 집을 지으며 살았던 곳이다. 한편 부엌의 취사와 난방은 주로 나무를 사용하다가 연탄을 거쳐 근래에는 기름보일러로 바뀌었다. 한편 아직까지 구식 아궁이를 사용하는 집이 간혹 있다. 예전에 땔감을 할 경우에는 가을걷이 후에 겨우내 나무를 하며, 특히 농무가리를 하는 경우에는 주로 1~2월에 실시하였다. 집 손질은 주로 농번기가 되기 전의 봄철에 한다. 흙으로 갈라진 벽을 바르고 지붕은 이엉을 새로 매어 올리며 문에 창호지를 바른다.
혼례(婚禮)
양구지역의 혼례는 제보자 10명을 통해 구체적으로 조사되었다. 제보자의 나이를 고려하면, 대략 1930년대 후반~1940년대의 혼례 풍습이 반영되었다. 이곳은 조혼의 풍습이 있었으며, 산간지역으로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혼례 격식이 많이 생략된 편이다. 이 지역의 혼례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혼인 연령은 남녀나 시기에 따라 약간 다르지만 대략 12~19세 정도이며, 남자는 15~16세, 여자는 16~18세로 볼 수 있다. 혼인은 대부분 중매에 의해 이루어지며, 중매자를 ‘쥐내비’, ‘중신아비’라고 한다. 이들에게 특별한 대가는 없으며, 경우에 따라 버선 1켤레나 혼례 때 상을 크게 차리는 정도이다. 혼인을 결정할 때에 사주와 궁합, 띠를 중요시 했으며, 특히, 여자가 말띠 뱀띠인 것도 삼갔다. 혼례 날짜를 정하는 것은 주로 신랑쪽에서 하는 경우가 많으며 신부측이 결정하거나 양가 합의에 의한 경우도 있다. 택일에서 눈이 오는 것을 길조로 여기고, 흐리거나 비가 오는 경우는 흉조로 여겼다. 이곳에서도 여러 혼인제도가 있었는데, 9~15세의 여자를 데려다 나중에 혼인시키는 민며느리제, 머슴을 데려다 일을 시키고 사위로 삼는 데릴사위제가 있고, 기타 아이를 데려오는 ‘얌선’, 친구간에 서로 누이를 바꾸는 ‘누비꿈’도 있다. 또한 과부를 업어오는 보쌈도 있었다. 그리고 신부집이 어려울 경우, 신랑측이 돈을 주고 데려오는 ‘선처’도 있었다. 함은 거리를 봐서 대례 전날이나 당일날 들어온다. 이곳에는 마을마다 말이 있어서 신랑은 흰 당나귀를 타고 오며, 가타 타고 오는 경우도 있다. 함에는 혼인날 입을 신부의 치마ㆍ저고리를 넣으며, 그 외에 여벌의 치마저고리, 패물, 이불감, 기타 옷 등을 넣는다. 함진아비는 하인이 맡는 경우가 많으며, 팔자 좋은 사람이 되는 경우도 있다. 특별한 대가는 없고 식사 대접이 보통이다. 경우에 따라 양가에서 품싹을 주는 경우도 있다. 이들은 거리가 가까우면 당일 돌아간다. 혼수품은 형편에 따라 차이가 많다. 이불만 가져오는 경우도 있고, 여유 있는 집에서는 농, 동고리(버들고리), 모지비, 은가락지, 3년간 입을 옷 등을 준비한다. 혼례복은 마을마다 준비되어 있어서 빌려 입는다. 다만 여유 있는 집에서는 새로 만들어 입는다. 신랑은 가슴에 학을 수놓은 파란색 관복을 입고, 사모관대(紗帽冠帶)를 한다. 그리고 신부는 치마저고리에 활옷을 입고, 족두리를 하며, 금봉채 비녀를 꽂고 꽃신을 신는다. 신부화장은 신부의 친척이 하며, 과부나 임산부가 하지 않는다. 한편 부모 중에 한 분만 살아계실 때에는 이마에 곤지를 찍지 않고 양쪽 볼에 연지만 찍는 경우도 있다. 하객을 위한 음식으로 국수와 장국을 대접한다. 신랑은 큰 상을 받는데, 주위에서 음식을 나눠먹자고 농을 걸면, 나중에 나누어 주기도 한다. 한편 축의금은 돈으로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옷가지를 가져왔다. 초례는 뒤에 병풍을 치고, 상 위에는 콩, 팥, 대추, 밤, 쌀 1접시를 올린다. 그리고 수탉과 암탉을 각각 남녀편에 놓고, 나중에 지붕 위로 날려보낸다. 양쪽에 촛불을 키는데 촛불 대신 황철나무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정화수와 청실홍실을 올리며, 사철나무를 올려 놓기도 한다. 초례는 신부집에서 하며, 홀기하는 사람의 말에 따라 움직인다. 입장해서 절하고 술잔 돌리는 식으로 진행한다. 신랑은 등장할 때 오리인형을 들고 입장한다. 장모나 신부측에서 이것을 받아서, 잘 살라는 의미에서 뒤주에 넣었다가 나중에 신랑측에 돌려보낸다. 초례의 과정을 보면 두 사람이 마주서서 각각 신랑 1번, 신부 2번 절하고, 이것을 2~3회 반복한다. 그리고 3잔의 술잔을 서로 마신다. 한편 신부가 있는 자리를 ‘공자리’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 입에 대고 마시는 흉내만 낸다. 이때 주위에서 신랑에게 농을 걸며 놀리기도 한다. 한편 신행을 당일 가는 것을 ‘맛배기’, 자고 다음 날 가는 것을 ‘도배기’라고 한다. 이에 따라서 첫날밤을 보내는 장소가 달라진다. 첫날밤은 오래 살라는 의미에서 동침을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날 ‘신방엿보기’, 또는 ‘신방지키기’가 이루어진다. 만약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방지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때에 따라 신부가 무서워 도망가는 경우도 있는데, 그러면 부부간의 금슬이 좋지 않다고 한다. 대례를 치르고 3일 후에 신부측 마을 청년들이 신랑을 다룬다. 신랑의 발을 천장, 기둥, 사람의 어깨, 지게에 매고 방망이로 때리는데, 심하면 다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신랑을 도둑으로 인식한 데에서 유래하며, 경우에 따라 신랑이 신체적으로 이상이 있는가를 확인하기도 한다. 신랑 집으로 신행 갈 때에 신부는 가마, 신랑은 말을 타고 간다. 이때 후객이 따라 가는데 대개 친정아버지는 가지 않고, 작은아버지가 가거나 집안 어른이 따라 간다. 신부는 처음 방문에 들어갈 때에 바가지를 깨거나 소금을 뿌린다. 부뚜막에서 다리를 올린상태로 국수를 먹게 하는 풍습도 있다. 이것은 살림 잘 하고 장수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는 조상께 먼저 국수를 올리고, 사랑채에 가서 시부모께 큰 절을 올리기도 한다. 이때 아들을 낳으란ㄴ 의미에서 대추와 밤을 던져 준다. 경우에 따라 어린 시동생에게 절값을 주기도 한다. 이날 후객, 중신아비는 큰 상을 받으며, 일반적으로 후객은 다음날 돌아간다. 부엌일은 집안에 따라 다른데, 보통 3일 정도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때 신부는 슬픔에 젖어 우는 일이 많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떨어진 버선 수십 켤레를 수시로 깁는 일을 한다. 이것을 ‘잠볼을 댄다’고 말한다. 부엌일은 4일째 되는 날부터 하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시집살이가 시작된다. 근친은 신부가 다음 해 10월쯤에 농사를 다 짓고 친정에 처음 다니러 가는 것을 말한다. 시기는 시댁 사정에 따라 다른데, 짧으면 3일, 보통은 10일~2개월이며, 경우에 따라 4개월을 머무는 경우도 있다. 근친 가는 것을 ‘댕기러(다니러) 간다’, ‘재항 댕기러 간다’, ‘처가집에 자러 간다’고 말한다. 보통 시아버지가 동행하며, 신랑과 같이 가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은 바로 되돌아 온다. 근친 가거나 올 때에는 엿, 떡, 닭, 술을 준비하며, 오래 머무를 경우에는 시댁 식구들의 옷을 짜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상례(喪禮)
상례는 망자의 숨이 끊어져서 3년상을 치르는 과정을 말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죽은 이를 위해 마지막 떠나보내고 추모하는 의식이다. 예전에 이곳에서는 보통 7일장이고, 다음에 9일장, 5일장의 순서로 나타난다. 심지어 10일장도 나타난다. 다시 살아나는 경우에 대비한다지만, 실제로는 교통이 불편해서 외지의 자식이나 친척에게 연락하는데 시간이 걸리고, 장례 치르는 음식과 술을 준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장례 기간이 길었다고 볼 수 있다. 근래에는 3일장이 일반적이다. 우선 사망을 확인하면 큰방으로 옮긴 다음에, 코ㆍ귀를 솜으로 막고, 입을 다물게 하며, 팔다리를 편다. 그리고 여자는 머리의 비녀를 빼고 실로 묶으며, 가락지와 같은 쇠붙이를 몸에서 제거한다. 부고는 대체로 동네의 이장이 돌린다. 초혼은 깨끗한 사람 중에서 시신을 보지 않은 동네 노인이 한다. 밥, 나물 3접시, 짚신 3컬레에 돈을 놓고 망자의 속적삼을 지붕 위에 올리며 사자를 부른다. 시신을 안치할 때, 머리는 동쪽ㆍ북쪽을 향하게 하며, 남쪽이나 서쪽은 피한다. 이곳에서는 성복과 입관 후에 시신을 바닥이 뜨거운 방안에 두지 않고, ‘퇴롱’이라하여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마당에 관을 살짝 묻어서 임시로 안치한다. 다만 방에는 빈 관을 갖다 놓는다. 수의는 여유 있는 집에서는 미리 손이 없는 윤달에 삼베로 준비한다. 상복으로 남자들은 삼베옷을 입고 굴건을 쓰며, 여자들은 흰색치마 저고리를 입는다. 염습은 목욕을 시키고 수의를 입히는 과정이다. 시신은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향물로 얼굴부터 씻는다. 이때 사자밥이라 하여 입에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생쌀을 넣는다. 한편 수의는 속옷, 바지저고리, 두루마기, 포대기의 순서로 입히며, 빠진 머리카락이나 손발톱은 몸의 4군데에 주머니를 만들어 넣는다. 시신은 위에서부터 21번 어긋나게 단단히 묶는다. 관은 보통 옻칠한 오동나무관을 주로 쓰지만, 원래 옻나무가 가장 좋다. 근래에 석관을 쓰기도 한다. 상여는 화챗간에 보관하며, 마을마다 준비되어 있다. 근래에는 상여 멜 사람이 적어 마을에서 순번을 정해 돌려가며 멘다. 장지까지 상여소리를 하며 간다. 중간에 1번, 3번, 5번식으로 쉬는 횟수를 홀수로 한다. 이때 상두꾼들에게 노자돈을 주어야 한다. 한편 명정(銘旌)은 이름과 관직을 쓴 기(旗)이고, 공포(功布)는 관을 닦는 삼베를 말한다. 이것은 공포, 만장과 함께 앞에 선다. 만장(輓章)은 죽은 자를 위해 쓴 기이다. 지금도 명정과 공포는 사용되지만, 만장은 거의 소멸되었다. 산 사람이 미리 묘자리를 만들어 놓은 것을 ‘생분’이라고 한다. 한편 시신은 잘 썩은 것이 좋으며, 이것은 하관 후에 회를 어떻게 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묘자리와 자식의 길흉을 연결시키려는 의식은 강하다. 특히 토질이 자식과 맞지 않고, 수맥인 곳은 좋지 않다고 여겼다. 칠성판은 썩지 않는 옻나무로 만들어 시신 밑에 깔며, 혼백은 12개가 들어간다. 회다지 후 머리와 사지의 위치에 따라 5곳에 재를 뿌린다. 이것은 이장(밀예)을 위한 조치이다. 매장할 때에는 보통 관과 시신을 분리해서 시신만 매장한다. 그러나 산이 좋지 않을 경우에는 관에 넣은 채로 매장한다. 시신의 방향을 잡는 것을 ‘안배를 잡는다’고 하는데, 상주의 뜻을 물어 재산운, 자손운을 맞춘다. 이때 망자를 매인(埋人)이라고 한다. 장례식에 고양이가 굴뚝을 넘어가면 좋지 않다고 여겨 붙잡아 맨다. 또한 매장시 딸이 시신을 보면, 부정이 타서 좋지 않기 때문에 관을 쳐서 살을 풀어낸다. 한편 예전에는 장례식에 팥죽을 쑤어 먹었는데,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인다. 한편 이곳에서 발인 전날 이루어지는 상여메기 예행연습은 다른 지방처럼 떠들썩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상여놀이 형태는 전해지지 않는다. 장례식에서 문상은 상주 및 가족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시켜 준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치며 밤을 같이 지냄으로써 침울하고 침체되어 있는 상가집을 떠들썩한 분위기로 바꾼다. 특히 장례가 7일, 9일씩 길어지면서 문상객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마을 사람이나 친지들이 그 기간동안 같이 참여함으로써 일종의 의례공동체가 형성된다고 볼 수 있다.
제례(祭禮)
제례는 조상에 대한 숭배의식이다. 이를 통해 혈연적 뿌리를 확인하고, 효를 통해 자기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 자손들의 혈연적 관계를 확인하고, 조상의 은덕을 통해 보다 여유로운 삶을 보존하기 위한 의도도 밑에 깔려 있다. 제례는 기제(기제), 사당제(사당제), 시제(시제), 시조제(시조제), 묘제(묘제), 차례(차례) 등 종류가 다양하다. 기제는 돌아가신 분의 기일에 지내는 제사이며 일반적으로 4대 봉사를 한다. 사당제는 대개 양반집에서 사당에 조상의 신부를 모시고 때를 맞춰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시제는 집안의 5대 이상의 조상에 대한 의례로 음력 10월 상달에 문중사람들이 사당이나 묘지에 모여 한꺼번에 지내는 제사이다. 근래에는 기제가 간소화되면서 시제의 대상이 3~4대까지 늘어나는 경향이 있다. 시조제는 가문의 시조를 제사지내는 의식이며, 묘제는 명절이나 특정한 날에 묘에서 올리는 제사이다. 차례는 정월 초하루와 팔월 보름, 기타 명절 아침에 모든 조상을 대상으로 올리는 제사이다. 이 때에는 제물로 시절 음식을 올린다. 양구지역의 제례는 주로 기제사를 중심으로 제시하겠다. 가문에 따라 제사의식에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이 지역의 대체적인 제례는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제사는 4대를 모시고 5대부터 시제로 돌린다. 제사는 장손이 주관하며 여자들은 음식을 만들기만 하고 남자들만 참석한다. 한편 결혼을 하지 않은 총각은 제사에 참여하되 술잔은 돌리지 않는 집안도 있었다. 그리고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는 제사밥을 나누어 먹기 위해 이웃주민이 참여하는데, 이들이 축관을 맡는 경우도 있다. 제사를 올리는 시간은 밤 12시경 이후에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예전에 통행금지로 일찍 지내던 풍습이 근래에 잘못 인식되어 하루 전날 지내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최근에는 이 지역에서도 대체로 저녁 10시 경에 지내는 것으로 굳어져 있다. 두 내외분이 돌아가시면 함께 잡수시라는 뜻에서 밥(메)과 국(탕)을 같이 올린다. 제사때 돌아가신 조상신의 친구들이 같이 내려오기 때문에 그들의 심술로 인한 액을 막기 위해 음식을 여유 있게 하는 경우도 있다. 제물의 진설은 '이율시조(梨栗柿棗), 이율조시(梨栗棗柿), 조율시이(棗栗柿梨),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 등의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모두 ‘이율시조(梨栗柿棗)’를 중심으로 한다. 따라서 좌측부터 배, 밤, 곶감, 대추의 순서로 진열한다. 간혹 '조율시이'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좌포우혜(左脯右醯)에 따라 포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에 위치한다. 삼과로 대추, 밤, 감을 쓴다. 기타 제물은 떡, 식혜, 주과포, 소적, 대적, 도리적, 3탕(소, 돼지, 해물탕), 삼채나물 등을 쓴다. 집안에 따라, 4발 달린 짐승의 고기를 탕으로 쓸 때는 삼탕을 쓰고, 이것이 없을 때에는 단탕을 쓰기도 한다. 특이한 것은 남면 용하리 지역의 어느 집에서는 고조부 제사에 떡을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제물은 집안의 형편에 따라 달라지며, 수복 이후에 살기 어려운 시절에는 제물을 제대로 갖출 수가 없어서 메와 탕, 술, 기타 몇 가지 기본적인 제물만 갖추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축문에는 벼슬을 밝히지만,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학생부근'이라 쓴다. 경우에 따라서 60세 이전은 '학생부군', 이후는 '처사'로 구별해서 쓰는 경우도 있다. 강신 때에 문을 여는 개문(開門) 풍습이 있다. 잔은 삼배를 올리되, 젓가락을 3번 움직인다. 이것을 ‘점지’라고 한다. 밥그릇 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는 시기는 절을 하고 잔을 드린 다음에 실시한다. 한편 제사 지낸 후에 지방은 밖에서 태우며, 제사음식은 자손들만이 먹는 것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같이 모여 음복을 했다. 근래에 와서 자식들이 대도시로 빠져나가면서, 제사는 크게 약화되었다. 따라서 노인들이 중심이 되어 간소하게 치르는 경우가 많으며, 더구나 전통적 격식이 간소화되고 다양한 종교적 의식으로 대체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효의 정신과 숭조(崇祖)사상이 희미해지고, 혈연적 공동체가 약화되어 가는 시대적 추세에 있다.
산속(産俗)
양구 지역에서 9명의 제보자를 통해 조사된 주요 산속의 내용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아들을 낳기 위해 비는 곳이나 대상은 산신당, 절, 칠성신 등이며, 심지어 산신당에서 100일간 거주하며 비는 경우도 있었다. 외갓집의 수저를 가져오거나, 수탉과 대추 끓인 음식을 먹기도 한다. 찬냉으로 불임이 되는 경우는 건초를 끓여 먹는다. 한편 산전에 금기하는 음식은 문어, 오징어, 생선, 닭(또는 닭뼈), 토끼, 오리, 개고기 등이며, 제사음식도 삼간다. 과일은 모양 좋은 것만 먹는다. 그리고 산전에 금기하는 일이 있는데, 불난 집이나 초상집에 가지 않고, 살생을 하지 않으며 집수리도 삼간다. 그리고 마음을 편히 하고, 좋은 말을 쓰고, 언행을 조심한다. 유산을 방지하거나 아이를 잘 낳기 위해 두레박줄, 은가락지, 호박줄기를 삶은 물을 먹고, 헌 짚신을 달아맨다. 또한 들기름이나 날계란도 먹는다. 한편 낙태를 시키기 위해 식초를 먹는 경우도 있다. 태아의 성별을 구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산모의 배를 봐서 아들인 경우에는 뾰족하거나 오른쪽이 높으며 배꼽이 우묵하다. 딸은 평평하고 왼쪽이 크며 배꼽이 위로 불거진다. 한편 콩을 집게 해서 홀수는 아들, 짝수는 딸로 구별한다. 고기를 좋아하면 아들, 과일을 좋아하면 딸이다. 또한 섣달 그믐날 만두를 화로에 넣어 아들은 쪼개지고 딸은 불거진다고 한다. 태몽으로 성별을 구별하는 방법도 다양하다. 아들인 경우에는 구렁이, 호랑이, 또는 짐승을 보고, 보름달을 안거나, 무지개가 부엌에 떨어지고, 장끼를 놓치거나, 큰 나무를 찍는 경우이다. 딸은 과일을 좋아하거나 복숭아나 벌어진 밤을 보는 경우이다. 한편 꿈에 짐승이 나가면 아이가 불행해진다고 여기며, 귀나 눈이 한쪽이면 비정상인 아이를 낳고, 태몽과 달리 낳으면 아이가 커서 고생을 한다고 여겼다. 아이를 낳은 후에 3일째, 1주일이나, 2주일 후에 삼신할머니께 미역국과 밥을 올린다. 한편 산파는 대개 시어머니이며, 피를 맑게 하기 위해 2주간 미역국을 먹는다. 산후에 산모가 금기하는 음식은 장국(속이 쓰림), 김치, 호박(이를 상함), 맵고 짠 음식, 감자와 계란(부스럼), 볶은 깨, 미나리와 상추(아이가 파란 똥)등이다. 음식 금기는 대개 2주 정도 적용된다. 그리고 산후에 산모가 금기하는 일은 살생, 못 박기, 상재 부정, 아이 칭찬, 닭ㆍ개고기 먹은 자 출입 등이다. 금줄은 이곳에서는 송침이라고 한다. 1주, 2주, 3주, 4주 등 다양한데, 대개 2주간 거는 경우가 많다. 남자인 경우, 새끼나 소나무 가지에 붉은 고추, 숯, 솔잎, 갖가지, 미역 등을 매달며, 딸은 솔가지, 숯을 매단다. 금줄은 태우지 않고 깨끗한 곳에 두어 자연적으로 썩게 한다. 산모의 젖을 잘 나오게 하기 위해 미역국, 돼지 족발, 보약 등을 먹거나 삼신할머니께 빈다. 인삼이나 식혜, 떡, 흰죽은 삼간다. 아이의 태는 보통 시어머니가 가르며, 본인이나 남편이 자르는 경우도 있다. 이때 가위를 쓰며, 아들이면 경우에 따라 목낫을 쓰기도 한다. 한편 탯줄이 좋거나, 난산(難産), 만산(晩産)인 경우에는 입으로 자르는 경우도 있다. 태는 왕겨나 아궁이에 넣어 태우며 다 탈 때까지 지켜봐야 한다. 간혹 자식이 없는 사람이나, 문둥병에 걸린 사람이 훔쳐가는 경우가 있으며, 태를 잃어버리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한다. 한편 태가 무좀에 좋다는 말도 있다. 출산의 시간, 띠에 따라 길흉을 점치기도 한다. 하루의 시간으로 봐서, 해 뜨는 새벽, 조용한 밤이 좋다고 하며, 해질녘(수명이 짧음), 낮에는 좋지 않다고 한다. 특히 여자는 밤이 좋지 않다는 말도 있다. 날짜는 3일, 7일이 좋은데, 음의 수를 중요시한 데에서 연유한다. 한편 띠에 따라서 길흉을 점치기도 하는데, 범띠는 밤이 좋으며, 소띠는 여름이 좋다. 용띠는 봄이 좋고 가을이 좋지 않다고 하는데, 용을 비와 연결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아이의 배냇저고리는 새로운 천으로 하지 않고, 외가에서 외할아버지가 입던 저고리로 만든다. 이것은 아이가 할아버지처럼 오래도록 장수하라는 의미를 지닌다. 배냇저고리에는 단추를 달지 않고, 단지 긴 끈을 달며, 보통 출산 3일째부터 백일까지 입힌다. 이 옷은 오른쪽부터 입히는 것이 좋다는 말도 있다. 왼손잡이가 좋지 않다고 여겨 아이에게 오른손에 감각을 익혀주기 위한 의도라고 본다. 아이의 목욕은 3일 수 아침부터 시키지만, 피부가 곱고 피부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매일 시키는 경우도 있다. 이때 얼굴과 손발의 순서로 씻긴다. 한편 손ㆍ발톱은 백일이나 돌전에는 가위나 칼로 깎지 않고 엄마가 이빨로 물어뜯는다. 이것은 얼굴이나 피부에 상처가 생기지 않게 하려는 어른들의 배려이다. 손ㆍ발톱은 절대 태우지 않고, 종이에 싸서 버린다. 한편 배냇머리는 백일 이전에 저절로 빠지게 하며, 백일이나 돌에 깎아준다. 삼짇날에 깎아서 아궁이에서 태운다는 말도 있다. 한편 아이의 이빨은 불에 넣지 않고 요강에 넣어 밭에 버린다. 백일 음식으로 백설기, 수수팥떡, 수수경단, 송편 등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날 삼신할머니께 밥을 해서 올리기도 한다. 떡을 이웃에 돌리면 돈, 실, 음식, 옷(속적삼)등을 답례로 보내며, 살기 힘든 집은 그냥 돌려보내거나 아예 받지 않으려는 집도 있다. 돌 음식은 형편에 따라 다르지만 송편, 수수팥떡, 수수경단, 팥경단, 인절미, 무지개떡, 개피떡 등이 있다. 역시 삼신할머니께 떡과 미역국을 올린다. 이곳에서는 아이가 10살까지 수수팥떡을 항상 준비해서 잡귀를 막아내고 아이의 건강을 기원한다. 이날 상잡이라 하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상 위에 책, 실, 쌀주발, 연필, 돈 등을 놓고 아이의 장래를 점친다. 여기서 실은 장수, 쌀이나 돈은 부자, 연필이나 책은 공부와 연결짓는다. 유아가 병에 걸릴 경우, 성인과 다른 다양한 민간요법이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체할 경우에는 참기름과 들기름을 파의 뿌리에 삶아 먹이고, 배탈에는 아편대를 삶아 먹인다. 그리고 이질에는 부추국을 먹인다. 또한 경기를 일으키면 영사에 젖을 묻혀 아이의 손ㆍ발바닥에 묻히고, 이것을 먹인다. 감기에는 파뿌리나 또는 여기에 참기름을 넣어 끓인 물을 먹인다. 두드러기와 피부병에는 쭈금바리풀, 인동덩굴 삶은 물에 목욕시키고, 눈병에는 소금물로 씻으며, 다래끼에는 눈썹을 뽑는다. 한편 일반적인 방법은 삼신할머니께 빌거나 정한수 떠 놓고 빌손을 하기도 한다. 이곳에는 산삼이 나는 곳이기 때문에 어린 삼을 아이에게 먹이면 건강해진다. 양구의 산속은 다른 지역과 유사하다. 다만 아들 낳게 해 달라는 기원의 대상으로 산신이 나타난다. 이 지역은 다양한 약초와 식물을 이용해, 산모의 신체 이상, 유산 방지, 보신, 아이의 질병 치료에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산후 금기음식도 매우 다양하다. 태아의 아들딸 예지법으로 섣달 그믐날의 만두를 이용한다는 점은 특이하다. 그리고 태몽에서 밤은 아들로 알려져 있지만, 벌어진 밤은 딸이며, 달은 딸이지만 보름달을 아들로 여기고 있다. 이곳에는 산파가 대부분 시어머니이고, 60대 이후의 할머니들은 전문 산파나 산부인과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출산을 했다. 또한 금줄을 송침이라 하며, 아들의 송침에는 미역을 거는 것이 특이하다.
양구지역의 전설
양구군의 설화로는 지명유래담과 인물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이 두 가지 종류 가운데 지명설화가 인물설화보다 훨씬 더 많은데, 이것은 양구의 지정적 조건이 궁벽한 협지인 데다가 경색(景色)을 가지고 있는 곳이 많은 데에 연유한다. 그 가운데 <대정리전설>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마을에 포악한 지주가 살고 있었는데, 중으로 가장한 도사가 시주를 청하자 소똥 한 삽을 떠주었다. 그러자 청천백일에 별안간 폭우가 쏟아져 지주의 기와집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몰살되고 그 자리에 큰 샘(大井)이 생겼다고 한다. 이 전설은 큰 호수 주변 마을에 흔히 있는 장자못 전설과 내용은 비슷하나, 다른곳의 호수가 여기서는 큰 샘(우물)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 그 화소는 장자못 전설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이곳의 지리적 특이성 때문에 생긴 설화이다. 이렇게 지세의 특이성이나 지명에 얽힌 설화로는 남면 용하리의 <몰구지 전설(沒龜池傳說)>이 있다. 이곳 용소에 용과 거북이 함께 살다 거북이 용에게 쫓겨 남면 청리의 샘물골로 가려다 봉황대에서 나는 봉의 울음소리를 듣다 그곳 땅이 꺼져 거북이 죽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이곳 지명과 지세가 화소의 핵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명과 지세 때문에 생긴 설화로는 이것 외에 청리의 <상통석굴전설(相通石窟傳說)>도 그러하고, <방산의 감사구렁이>도 이러한 유의 이야기이며, <실학(失鶴)고개와 학조리 전설>, <방산의 김등매(金登梅)아가씨와 강선대 전설(降仙垈 傳說)>, <소문치(小門峙)와 한씨부인>, <잔바위와 등천선녀>, <옥녀탄금대> 등이다. 이들은 화소를 지명이나 지세에서 얻고 있는 예화들이다. 인물설화로는 유교사회에서 생활규범으로 권장하였던 효행, 정절의 설화와 장수설화가 있다. 효행설화로는 효성이 지극한 현감 김현도가 꿈에 신의 계시를 받아 병석의 어머니를 찾아가는 도중에 솔개가 하늘에서 가물치를 떨어뜨려 주어 그것을 달여드려 어머니를 소생시켰다는 <김현도 현감의 효행설화>가 있고, 남편이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본 부인이 호랑이와 싸워서 부부가 함께 호랑이에게 죽음을 당한 뒤 그 무덤에서 두 가지의 소나무가 났다는 <열녀박씨 송아현(松芽峴)의 정렬설화>가 있다. 장수설화는 장수와 용마에 얽혀 있는 우리나라 곳곳에 있는 설화와 다를 바가 없다
김부리와 군량리
신라가 고려에 항복을 한 뒤의 일이다. 김부왕-마의태자-은 천추의 원한을 가슴에 품은 채 수십 명의 수종병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향하여 왕도 경주를 떠나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강원도 인제군 남면 김부리까지 와서는 피로한 몸을 쉬기 위하여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러 계시었는데, 이러하므로 해서 뒷날 이곳을 김부리라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수종병 중에 가장 충성스러운 맹(孟)장군이란 이가 의병을 초모하여서 왕건(王建)의 군사를 물리치는 것이 상책이라고 김부왕께 주달하자 김부왕도 이것을 찬성하여 곧 좌우의 여러 신하들을 여러 고을로 보내어서 의병을 초모해 오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금의 양구군 북면 군량리 넓은 벌에서 초모해 온 의병을 일변 훈련을 시키고, 한편으로는 그곳에다 군량고(軍糧庫)를 쌓고, 군량미(軍糧米)를 거둬 드리었다. 그러나 이 거사를 하기 전에 맹장군은 한 많은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므로 장군을 잃은 수백 명의 의병들은 비통한 나머지 가슴을 쳤을 뿐이요, 맹장군의 유품을 묻은 뒤로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뒷날 군량고가 있던 곳을 군량리(軍糧里)라 하였다고 한다. ※ 양구전설이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것은 1947년 최상수(崔常壽)의 《조선지명전설집》에 나타난 지명전설인 <김부리와 군량리>이다.
보덕굴과 관음보살
지금으로부터 약 1,000년 전 이야기. 금강산 송라봉(松蘿峰) 기슭에 있는 송라암(松蘿庵)에는 당시 혈기 왕성한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회정선사(懷正禪師)로서 천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천일기도도 앞으로 며칠 남지 않은 어느 날 밤 꿈에 법기보살(法起菩薩)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양구군 해안면 방부동에 몰골옹처사(沒骨翁處士)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급히 그곳을 찾아 교법을 배우도록 하여라.”하는 말을 듣고 급히 그곳을 찾았다. 거기에는 우거진 수풀이 있었으나, 마침내 조그마한 집 한 채를 찾아 대문을 열고 소리쳐 물어 보았다. 나타나는 사람은 십팔ㆍ구세의 어여쁜 처녀였고,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청년 중 한 사람은 망설이다가, “여보 아가씨, 이 곳에 몰골옹처사라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즉 처녀는 좀 놀라는 표정으로, “누구신지 모르나 물으시는 몰골옹처사는 우리아버지입니다.” “아! 그렇습니까? 나는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님의 말씀을 듣고 당신의 아버지에게 교법을 배우러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요? 모처럼 찾아오셨지만 헛일이십니다.” 어여쁜 그 처녀에게 호기심을 가진 청년 중은 쉽게 돌아설 리가 만무할뿐더러 더욱 가까이 다가서며 묻기를 재촉하였다. “그건 왜요?” “정말 우리 아버지란 사람은 당신에게 교법을 가르쳐 드리지 못할 것은 물론이요, 도리어 천성이 흉악하여 알지 못한 사람을 보면 해를 끼치지 않고는 그냥 두지 않습니다. 낮에는 사냥을 나가시는데 벌써 해가 저물었으므로 곧 돌아올 것이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주십시오.” “그렇지만 법기보살님이 거짓말 하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아무튼 지금 돌아간대도 도중에 날이 저물 것이니 아버지께 어떻게든지 잘 말씀하여 주십시오.” 너무나 애타서 덤비는 이 청년 중에게 어찌할 바를 모를 것만 같던 그 처녀는 의외에도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난처합니다요. 아버지가 당신을 보면 기필코 그저 두지 않을 터인데….” “각오했습니다. 당신의 아버지시면 나는 기쁘게 그 위해를 받겠습니다. 그것이 법기보살님의 하신 일이니까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제 다시 그렇다고 법기보살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그 청년 중은 처녀에게 사랑을 가지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처녀 앞에서 그 아버지에게 죽게 되더라도… 그것도 보살님의 말씀일 것이면 만족이라고 생각하였다. 한편 돌아갈 것 같지 않은 청년 중의 애원에 처녀의 마음도 움직였다. “그러면 이렇게 하시죠.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버지도 가해하지는 않을 것이니 나와 부부를 약속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눈치를 보아 잘 꾸며 말씀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나의 소원은….” “오늘밤만 무사히 지내면 내일 아침 아버지는 또 산으로 사냥을 가시고 없을 터이니 그 때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참으로 갑사 합니다. 아무튼 잘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만사를 저에게 맡기십시오.” 처녀는 고운 손을 젖가슴에 얹으며 청년 중을 쳐다보았다. 그는 얼굴에 기쁨이 가득하였다. “당신의 이름은 무어라 합니까?” “예. 보덕(普德)이라 합니다.” 청년 중은 보덕을 처음 보았을 때, 첫인상은 깊이 그 자태를 가슴에 불살라 놓았다. 더욱이 겉말이나마 부부라고 아버지께 잘 꾸며 말하여 주겠노라 하는 꿈같은 말에 가령 그것이 거짓 사랑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여자로서는 퍽 어려운 일일 것임을… 참으로 청년 중은 마음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처녀는 잘 말하고 아버지의 눈이 닿지 않은 곳에 숨겨주었다. 그런데 딱한 일은 청년 중이 그 처녀를 잊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 이튿날에도 그는 돌아갈 줄 모르고 머물렀다. 하루는 기어이 덤벼들려 하였다. 보덕을 안으려고 한 그 순간 기절의 상태였다. 한참 후에야 꿈에서 깨어난 사람 모양으로 정신을 차려 눈을 떠 본즉 꿈인지 생시인지를 얼핏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사랑에 취한 청년 중은 우선 그리운 보덕을 찾아보았다. 이상하게 보덕은 그림자와 같이 자취를 감추었고 자기가 서 있는 옆에는 그의 모양과 같은 한 개의 바위만이 우뚝 서 있었다. 그는 미친 사람 모양으로 다만 그의 자태를 찾아 날뛰었다. 이상하게도 그가 온 길이 전에 왔던 길이매 그는 내금강(內金剛)에 이르렀다. 청년 중은 갑자기 여자의 뒤를 따라 헤매었던 것을 고쳐 정신을 가다듬어 원화동천(元化洞天)의 앞까지 와 있었다. 다시 산비탈을 돌다가 내려가니 반갑게도 보덕은 저 편 개울에서 머리를 감고 있다. 그는 보덕을 보자 나는 듯이 쫒아 갔었다. 그러나 보덕은 새와 같이 달아나 종내는 자취를 감춰 버렸다. 청년 중은 또다시 만폭동(萬瀑洞)계곡을 찾고 있는데, 갑자기 근처 연못에 찾는 사람이 우뚝 서 있었다. “아! 당신은….” 하고 부르며 그 그림자의 자취를 찾으려 앞에 있는 봉우리를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보덕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의외에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엄연히 서 있었다. “참 이상하다. 저것이 보덕으로 보이는 것은….”하며, 다시 연못을 본즉 거기에는 보덕의 자취였던 그림자는 어느 사이에 관음보살의 그림자로 변해 있었다. 청년 중은 얼른 무릎을 꿇고 허리를 굽혔다. 아! 잘못했다. 보덕으로 보인 그 여자는 관음보살의 권화였구나, 청년 중의 전신은 소름이 끼쳤다. 관음보살은 자기의 수업을 시험하기 위하여 보덕으로 변하여 자기의 마음을 알아보았던 것을 이제야 깨닫고 한참을 그대로 울어 버렸다. 그리하여 청년 중은 자기의 수업의 약함을 깨닫고 참회하여 다시 전심 수업하여 이름 높은 중으로서 여러 승려에게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 뒤에 선사는 보덕의 자태를 본 법기봉(法起峰)의 중턱에 지금의 보덕굴(普德窟)을 이루어 관음보살을 안치하고 수업득도 하였다고 한다. (단기 4270년 8월 회양군 회양면 읍내리 朴辰成氏 談) ※ 1985년 최상수는 《한국민간전설집》에서 <보덕굴(普德窟)의 관음보살(觀音菩薩)> 전설을 소개하고 있다.
파를 먹게 된 동기
옛날 아주 오랜 옛날. 사람이 소로 보이던 때가 있었다. 어제까지도 사람으로 보이던 것이 갑자기 소로 보이므로 사람들은 날마다 사람을 잡아먹었다. 더구나 잡아먹는 것은 모르는 사람만이 아니고, 한 마을 사람이나 심하면 부자 형제 사이일 때도 있었다. 하루는 한 청년이 마을 사람들과 늙은 황소 한 마리를 맛있게 먹고 나서 보니 그것은 바로 자기의 아버지였다. “아버지, 아버지, 이 천하에 머리를 들지 못할 불효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저 모든 것은 이 두 눈 때문입니다. 이 두 눈에 아버지가 소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어이…어이…이 일을 장차 어떻게 하나.” 청년은 땅을 치며 목을 놓아 통곡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얼마 동안을 울다가 일어난 청년은 얼굴에 굳은 결의의 빛이 완연했다. “찾아가 보자, 어디고 한없이 가면 반드시 사람이 소로 보이지 않고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약이 있을 것이다. 나는 목숨과 바꾸더라도 그 약을 구해다가 이 불행한 마음을 건지고야 말리라.” 굳게 결심을 한 청년은 이튿날로 곧 길을 떠났다. 집을 떠난 청년은 걷고 또 걸어서 한없이 갔다. 그러나 청년이 가는 곳에는 어디에도 마음을 먹은 약이 없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도 사람은 소로 알고 날마다 잡아먹고 있었다. “흥, 어느 곳이든지 모두 다 그 모양이로구나.” 청년은 한숨을 지으며 크게 한탄했다. 그렇다고 마음에 결정한 것을 단념해 버릴 수는 없었다. 청년은 쉬지 않고 자꾸만 걸었다. 이렇게 하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서 청년은 어느덧 늙은이가 되었다. 머리가 세고 등이 구부러졌다. 그렇지만 마음먹은 약이 있는 나라는 눈에 띄지 않았다. 눈이 어둡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이제는 빨리 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동안에 어떤 고요하고 아늑한 마을에 이르렀다. 푸른 산과 맑은 냇물을 끼고 집들이 총총히 들어서 있었다. 그는 마을 어귀에 이르러 늙은 소나무 아래에서 다리를 쉬었다. 근처에는 밭이 있고 거기서는 알 수 없는 향기로운 냄새가 풍겨왔다. “그 냄새, 참 좋다. 무슨 풀이기에 저렇게 좋은 냄새를 풍기는 것일까?” 그는 밭을 둘러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밭에는 기다란 풀이 가지런히 가구어져 있었다. “거기에 앉아서 쉬는 낯모를 분은 누구요?” 이 때 소나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흰 구렛나무가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노인이었다. “네, 나는 지나는 나그네인데 다리가 아파서 잠깐 쉬고 있습니다.” “보아하니 젊지도 않은 분이 어디를 가시는 길이시오?” “허허, 나는 새파란 청년이었건만 사방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동안에 이렇게 늙었답니다.” “원 저런, 그래 무슨 볼일로 그렇게 떠돌아다니시오?” “약을 구하러 다닙니다.” “무슨 약이오?” “사람이 소로 보이지 않고 그대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약 입지요.” 여기서 나그네는 자기나라 사정과 자기가 한평생을 떠돌아다니게 된 까닭을 하나도 빼지 않고 자세히 이야기했다. “허허, 그것 딱한 사정이로구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노인은 가엾다는 듯이 나그네를 바라보았다. “사실은 우리 고장에서도 옛날에는 사람이 소로 보여서 날마다 잡아먹는 실수를 저질렀소. 그러다가 저기 저 밭에 심은 풀을 먹은 후부터 비로소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고, 소는 소로 보여서 그런 잘못이 없었소.” 이 말을 듣고 나그네는 뒤집힐 듯이 놀랐다. “어쩐지 냄새가 좋더군요. 그래 저 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저 풀은 파라는 것이오. 맛도 대단히 좋고.” “아아, 이제야 소원을 풀었습니다. 나에게 그 풀을 조금만 나누어 주십시오.” 나그네는 너무도 기뻐서 땅에 꿇어앉아 노인에게 간청을 했다. 그리하여 파 씨를 한 봉지 얻어서 품속에 깊이 간직했다. 가슴에 기쁨을 한 아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남향 밭, 기름진 곳을 골라서 곧 파 씨를 뿌렸다. 그리고는 즐거움을 참지 못해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슬픈 일이 있었다. 사람들의 눈에는 나그네가 소로 보였기 때문에 모두 도끼를 들고 덤벼들었다. “아니오. 나는 소가 아니라 사람이오.” 하고 나그네가 기겁을 하고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얘, 그놈의 소 매우 크게 운다.” 하며, 사람들은 마침내 나그네를 잡아먹어 버렸다. 밭에 우거진 파를 사람들이 발견하여 먹은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풀이 하도 향기로워서 먹어보니 맛도 또한 기가 막히게 좋아서 사람들은 날마다 반찬으로 먹게 되었다. 그런 후로 사람들은 사람을 소로 보는 일이 없어진 것이다. 이렇듯 나그네의 노력과 희생으로 마을에는 끝없는 평화가 깃들었다는 것이다. ※ 1972년 박영준의 《한국의 전설》에 소개하고 있다.
정절녀(貞節女)의 유래
원도 양구군 방산면 땅 한 마을에 천석꾼인 맹진사가 살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서….” 맹진사의 탄식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우리 집안은 아주 망하려나보다.” 맹진사는 생각하느니 수심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맹진사는 그 고을에서 제일가는 부자요, 지체도 남에게 떨어지지 않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슬하에는 늦게 본 아들 경환(景煥)이 뿐인데 그 아들이 알지 못할 병에 걸려서 신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데려다가 경환의 진맥을 보고 약을 썼으나 별 효험이 없는 것이다. 지혜가 있으면 무엇을 하며 돈이 있으면 무엇에다 쓰랴. 단 하나밖에 없는 귀한 아들이 병에 걸려서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그렇다고 그대로 앉아서 아들이 죽기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바다보다 넓은 것은 하늘이요, 하늘보다 넓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요, 사람의 마음 중에서도 으뜸가는 것은 어버이의 마음인 것이다. 맹진사는 경환의 나이 이십이 가까워 옴에 이제는 다 길렀다고 흡족해 했으나 이제는 그 마음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대신 근심과 걱정만이 쌓일 뿐이었다. “병명이라도 좀 알았으면 속이나 시원하겠습니다.” 맹진사는 백 리 밖에서 불러온 의원이 아들의 진맥을 짚는 것을 지켜보며 초조한 심정을 감추지 못하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을 했다. “글쎄올시다. 나도 병명을 잘 모르겠는데요. 그러니 약방문도 낼 수가 없군요. 죄송합니다마는 딴 분을 한 번 모셔다 보시지요.” 하며, 의원은 홀홀히 맹진사의 집을 떠나 버리는 것이다. 딱하고 기가 막혔다. 그러면 경환의 증세는 어떠한 것이었는가. 몸뚱이에 종기가 나서 하나가 아물면 또 딴 곳이 터져서 진물이 나고 그 주위로 자꾸 번져 가는 것이다. 그러던 것이 요즘에 와서는 얼굴에까지 그 증세가 나타나서 터지고 아물고 진물이 흐르는 데다 눈썹까지 뭉청 빠져나간 것이다. 말이 말을 만들고 소문이 소문을 만들어 근처에는 숙떡숙떡 말이 많았다. “맹진사 아들이 천형병(天刑病)에 걸렸다면서.?” “글쎄, 들으니 그렇다는데.” “그거 참 안 됐군.” “야단이군. 맹진사는 아들 경환이 뿐이 아닌가.” “그렇지….” “그 재산이 아깝군.” “에이 이 사람아 재산이 문젠가 대가 끊어지는데.” “그렇기도 해, 어디 문둥병이야 고치는 수가 있나.” 동네 사람들은 모여 앉기만 하면 맹진사의 아들인 경환의 병에 대해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내 아무리 천운이 박복하기로서니 단 하나밖에 없는 손이 천형병에 걸리다니….” 참으로 청천의 벽력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는 맹진사의 가슴속에서는 하나의 애절한 희망이 솟아올랐다. “총각 귀신이나 만들지 말아야지.” 그러나 그것 역시 그리 손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누구 하나 맹진사가 있는 자리에선 경환이 문둥이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돌려 세워 놓고는 입을 모아 수군거리는 것이었다. “누가 문둥이에게 딸을 줄 사람이 있나. 아무리 재산이 천석꾼이면 뭘 하고 만석꾼이면 뭘 해.” 이러한 말이 자연히 퍼져 거의 이러한 맹진사의 단 하나의 애절한 희망도 허사였던 것이다. 재산으로도 남의 입을 막지 못하고 탄식으로 소일을 하는데, 천우신조로 이웃 마을에 사는 송씨 집안에서 청혼을 해 왔다. 중매쟁이를 사방으로 보내서 신부만 똑똑하면 친정의 먹고 살 것을 대어 주는 것은 물론 신부만 내어놓기만 하면 알몸을 싸서 데려오겠다고 한 것이 효과를 본 셈이었다. 또한 경환이 문둥병이라는 소문이 이웃 고을까지는 아직 퍼지지 않았던 덕도 있었을 것이다. 송씨 일가에서는 맹진사의 집이 문벌도 과히 떨어지지 않는데다 재산이 많다는 말에 깊이 알아보지도 않고 혼사를 작정하였던 것이다. 맹진사는 곧 택일날짜를 보냈다. 맹진사는 소문이 날까봐 초조한 속에 혼사를 서둘렀다. 그러나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의 상정이다. 혼례를 닷새 앞두고 경환의 병은 더 심하여 얼굴의 종기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이 번지고 몸이 고달파 몸저 눕고 말았다. 이러한 정상으로 어찌 혼례청엘 나갈 수 있으랴. 답답한 것은 경환이보다 맹진사였다. 맹진사는 죽고만 싶었다. 그러나 운명은 맹진사를 버리지 않았다. 대사를 이틀 앞둔 날 아침 생각지도 않은 김진사의 아들인 순익이 뜻밖에도 찾아왔다. 김진사와는 어려서부터 숙친한 사이라 늘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녀서 전에도 여러 번 맹진사의 집을 드나들었었다. “무슨 일이 생겨서 왔는가?” “네. 실상은 아버님도 모르시게 저 혼자 생각으로 좀 뵈러 왔습니다.” “어서 말을 해 보게나.” “다름이 아니오라 돈 삼천 냥만 돌려주십사 하고 찾아뵈러 왔습니다.” “자네가 삼천 냥은 무엇에다 쓰려는가?” “다름이 아니오라….” 말은 이러하였다. 김진사가 벼슬을 하는 동안에 돈을 모으기는커녕 가산을 탕진하다시피 하여 할 수 없이 호구책을 꾸미기 위해 공금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다가 실패를 했다는 것이다. 잠자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맹진사는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자네 자의로 내게 왔다고 했지?” “예” 김진사의 아들은 가슴이 떨렸다. 자기 집안의 성쇠가 달린 일순간이었다. “주지.” “네?” “돈은 주겠네만 내 청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겠나?” “네. 어떠한 일이라도 감수하겠습니다.” 한참을 망설이는 맹진사는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네도 우리 집 사정을 알다시피… 그래서 자네가 경환이 대신 신부집에 가서 대례를 지내고 며느리를 데려다 주는 일일세.” “….” “뒷일은 내 담당할 터인즉 염려할 게 없네. 그리고 다행한 것은 신부집에서 신랑 선을 보지 않은 것일세.” 이 말을 들은 김진사의 아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승낙을 하고 말았다. 물론 돈 삼천 냥도 문제였지만 말을 듣고 보니 차마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뒷일은 맹진사가 책임을 진다니까 마음도 어느 정도 놓였다. 이리하여 혼사는 예정대로 무사히 끝이 나고 순익은 맹진사가 시킨 대로 몸이 편치 아니하다 칭탁하고신방에는 들지 않고 삼일을 치르고 무사히 돌아와서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폐백을 드리는 날 밤에 신부는 기절을 하듯이 놀랐다. 초례를 지낸 남편은 간 곳이 없고 꿈에도 보기 무서울만치 흉측한 남자가 정작 남편이라니…. 그러자 시아버지 되는 맹진사가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며느리를 잡고서 사정을 하는 것이었다. 굴욕을 참을 수 없는 신부는 그만 야반도주를 해서 친정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맹진사는 며느리를 데려다 놓고 사정을 하면 신부가 제 아무리 똑똑한들 별 수 없이 말을 들으리라 생각했던 것인데 이렇게 되고 보니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말도 못하고 그만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눕고 말았다. 이와 반대로 송씨 일가에서는 사기 결혼이라고 들고 일어나서 초례를 지낸 신랑을 찾아내지 않으면 관가에 고소를 하겠다고 위협을 해왔다. 자, 이쯤 되고 보니 맹진사도 딱했지만 김진사의 아들도 딱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김진사는 폐백을 받고 아들을 그리로 장가를 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김진사에겐 순희(順姬)라는 열여덟 난 딸이 있었다. 측정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러한 사연을 들은 순희는 분연히 정색을 하며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어린 제가 무엇을 알겠습니까마는 지금 듣자오니 우리 집이나 송씨네는 전화위복이 되어 다행이오나 맹진사댁은 이로 인해서 더 마음의 고난을 당하게 되었사오니 그 얼마나 딱 하옵니까. 그리고 또 아버님께서도 맹진사댁의 삼천 냥의 후원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쯤 아버님은 물론 이려니와 우리 집안이 어찌 되었을지 알겠습니까.” “그야 네 말이 그른 배는 아니다마는 어찌 할 수 있느냐?” “맹진사 댁에서는 결국 이제나 저제나 며느님 하나만 얻으면 되지 않겠어요.” “그야 그렇겠지.” “그렇다면 제가 그 집 며느리로 가겠어요.” “아니 문둥이의 계집이 되겠단 말이냐?” “놀라실 일이 아니라 우리 집 처지를 생각하신다면 무어 그리 대단할 것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니 아버님께서는 제가 가는 길을 막지 말아 주시옵기 바랍니다.” 김진사는 기가 막히는 일이었으나, 감히 딸의 뜻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한편 맹진사는 김진사의 딸이 자기의 며느리 되기를 자원한다는 말에 눈물을 흘려가며 감사했다. 목마른 자가 샘을 발견한 셈이었다. 이 말을 전해들은 경환도 만족하여 고통 속에서도 기쁜 빛을 나타냈다. 맹진사는 순희를 며느리로 맞아들이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기쁨 속에 세월 가는 줄을 몰랐다. 그러나 기쁨도 순식간이었다. 경환의 병은 점점 도져서 그 명이 경각에 달렸다. 아무래도 경환의 목숨이 밤을 넘기지 못할 것만 같았다. 순희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렇다. 여필종부라 하지 않았는가, 나도 따라서 죽자.” 순희는 결심을 하고 고이 간직했던 비상을 물에 타서 머리맡에다가 놓고 마지막 숨을 재촉하는 남편을 남겨놓고 뒷동산으로 올라가서 멀리 친정 쪽을 향해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내려왔다. 방으로 들어서 순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비상을 타놓은 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경환은 중병 속에서 희미하게 정신을 가다듬어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아내를 찾았으나 대답이 없는지라 그대로 누운 채로 머리맡을 더듬어서 비상을 타 놓은 물을 마신 것이다. 그러나 이 어이된 일인가? 남편은 다시 물을 찾았다. 순희는 한편 놀라고 한편으로는 반가 와서 달려 나가서 물을 떠다 입에 대 주었다. “아니 이물 말고 아까 먹던 물을 좀 주구려.” 순희는 다시 한번 놀랐다. 순희가 망설이자 경환은 짜증을 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달려 나왔다. “도대체 아까 저 애가 먹은 것이 무엇이냐?” 맹진사는 초조하게 물었다. 순희는 이쯤 되고 보니 말을 아니 할 수 없어서 지난 경과를 상세히 말했다. “그래? 비상은 보통 상한 사람이 먹으면 죽되, 그 병에는 약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만약의 경우 죽는다고 한들 다 죽게 된 사람이니 무슨 한이 되겠느냐. 비상은 내게도 있으니 어서 물에 타 먹이도록 해라.” 맹진사는 말을 마치기가 바쁘게 사랑으로 나가서 비상봉지를 갖다 주는 것이다. 비상을 탄 물을 마신 경환은 온 몸에 번졌던 종기가 모두 아물고 마침내 맑은 새살이 돋아 나왔다. 그는 완전히 병을 고친 것이다. 참으로 우연한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아내의 정절한 마음씨가 마침내 남편의 병을 고치게 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정절녀라 일컫고 정절문을 세어서 그녀의 갸륵한 정신을 길이 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문둥병에 비상을 먹어서 나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비과학적인 이야기임을 분명히 부기하는 바이다. (비상은 사람이 먹으면 즉사하는 극약이다.) ※ 1972년 박영준의 《한국의 전설》에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