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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신앙

마을의 수호신으로 받들어지는 동신의 명칭을 계통상으로 분류하면 천신, 일신, 성신, 산신, 수신(樹神), 지신, 수신(水神), 사귀, 인신(人神)등이다. 이러한 마을 신앙 중에서도 보편적으로 보이는 것은 산신, 서낭신, 국수신, 장군신, 용신, 부군신 그리고 장승, 솟대 신앙으로 나타난다. 마을은 산을 등지고 남향을 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마을 뒷산 중턱 또는 산 정상에 산신을 모신 산신당이 있는 것이 양구 지역의 대체적인 경향이다.

양구 지역에서는 현재까지 각 읍, 면, 리, 반 등으로 나누어 본다면 양구지역 전체적으로 약 80여개소의 마을 동제가 행하여 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도 점차적으로 우리의 농촌문화가 기계화, 산업화, 노령화 되면서 축소 내지는 전승의 단절로까지 나아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양구 지방에서도 고래로 현령(縣令)이 주재해서 치제하는 성황단이 비봉산(飛鳳山)에 있었고, 안대리에는 사직단(社稷壇)이, 함춘리에는 여단(癘壇)이 있었다. 그래서 진신(鎭神)에의 치성(致誠)은 성황사(城隍詞)에서, 농사의 기원은 사직단에서 잡귀(雜鬼)의 위안은 여단에서 각기 해마다 춘추로 치제(致祭)해 왔다.

제일(祭日)이 정해지면 제수(祭需)를 장만할 집을 선정해서 도가(都家)로 삼는다. 사흘 전에 도가와 성황단에는 금색을 치고 황토를 뿌려서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엄금하고, 제물은 가장 정결하게 봉공(奉供)하도록 의무화 되어 있다. 만약 그 사이에 동네에서 초상이나 그 밖의 부정 불결한 일이 발생하면 부득이 제일을 연기하던가, 아니면 부정한 집에 출입한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체 접근하지 못하게 한 뒤에 근신하고 재계한 사람들만으로 치제하기도 하였다. 제일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성황사에 모여 제를 올린다. 부락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대개는 연장자가 헌관(獻官)이 되고 차례대로 책임이 정해져 질서 정연하게 제사가 행해진다. 곳에 따라서는 홀기(笏記)를 창(唱)하면서 치제하기도 한다.

제사를 지낸 다음에는 모든 제물을 모인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음복한다. 이 성황제는 먼 옛날부터 누구나 숭신사상(崇神思想)이 짙어서 시키지 않아도 저마다 신의 노여움을 두려워해서 자발적으로 정성을 드리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정기적인 대제(大祭)말고도 가정에 불안스러운 일이 발생하면 단독으로도 간소한 제물을 마련하여서 곧잘 치제하는 경우가 많았고, 간혹 이러한 일을 찾아 볼 수 있다. 남면 가오작리의 ‘서낭골’, 도촌리의 ‘산제(山祭)나뭇골’, 적리의 ‘산제골’, 양구읍 학조리 삼선당의 ‘성황당(城隍堂)’, 월명리의 ‘서낭거리’, 당골(堂谷)의 ‘성황당’, 안대리의 ‘산제당(山祭堂)골’, 동면 임당리의 ‘서낭골’, ‘작은 서낭골’ 등은 모두가 성황당이 소재(所在)한데 연유하여 이름 한 곳이다.

동면 월운리

  • 1. 제의의 명칭

    산청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8월 13일 밤 10시

  • 3. 제 물

    돼지머리, 삼색실과, 포, 어물, 제주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여성은 제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금색은 산신당과 도가집에서만 한다.

동면 임당2리

  • 1. 제의의 명칭

    산청제

  • 2. 제 의 일 시

    3월 3일, 9월 9일 오전11시

  • 3. 제 물

    돼지, 메(새옹밥), 시루떡,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수퇘지만 사용, 제사전 돼지를 마을에서 잡는데 반드시 산신당 앞에서 잡는다. 비용은 각 가정에서 쌀 한 되를 각출하며 나머지 비용은 마을 기금에서 사용한다. 과일은 사용하지 않는다.

동면 팔랑2리 5반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8월 14일

  • 3. 제 물

    돼지 한 마리, 포, 어물, 메(과일은 올리지 않는다.)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 5. 금 기

    유교식제의, 소지, 제관은 3명, 금색은 일주일 전에 치며 제주로 일주일 전에 담근다. 비용은 마을 공공기금으로 한다.

해안면 현1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음력 8월(날받이)

  • 3. 제 물

    돼지머리, 주, 과,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양구읍 학조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9월 9일

  • 3. 제 물

    돼지머리, 북어 20마리, 메, 3채, 삼실과, 포

  • 4. 제 차

    제사 한달 전에 제당에 금줄을 친다. 제일(祭日) 전날 제물을 장만하여 제당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제사를 지낸다. 제관은 2명이며 윤번으로 돌아가면서 도가와 제관을 맡는다. 과거에는 돼지를 잡아 통째로 진설하였으나 축소되었으며 축문은 전승되지 못하였고, 주민 모두가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소지만 올린다.

양구읍 안대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 3. 제 물

    돼지머리, 메, 삼탕, 삼실과, 포

  • 4. 제 차

    유교식 제의, 소지, 도가와 제관은 점쟁이가 정하여 준다. 도가에서는 시장보기, 음식장만을 한다. 도가는 개ㆍ닭고기 등을 먹지 못하며 부인과 동침하지 않는다. 또한 도가와 제관이 정하여 지면 도가와 제당에 금색을 친다. 제의가 끝나면 마을 주민이 음복한다.

양구읍 상3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 3. 제 물

    돼지고기, 삼실과, 포, 메

  • 4. 제 차

    도가와 제관은 제사일 사흘전 생기복덕을 맞추어 선정한다. 도가와 제관은 닭ㆍ개고기를 먹지도 않고 잡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산신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도가 1명과 제관 2명을 선정한다. 음력 2월 그믐에 가구별로 경비를 염출한다. 그리고 초하룻날 시장을 본다. 제사 당일 돼지고기는 새벽에 삶고 메는 산신당에 가서 직접 짓는다. 그리고 유교식으로 제를 올린다. 제사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과 아침에 음복한다.

남면 죽2리

  • 1. 제의의 명칭

    산신제

  • 2. 제 의 일 시

    음력 3월 3일, 음력 9월 9일

  • 3. 제 물

    닭, 삼실과, 북어, 포, 밥 2그릇, 소금 3접시, 정한수

  • 4. 제 차

    제사 보름전 이장이 부정이 없는 사람을 선정하며 제관과 축관도 같은 방법으로 선정, 위패는 나무로 깎아 산천지신위라고 쓴다. 위패는 제사후에 태우거나 제당 주위에 꽂아둔다. 제사일에 닭을 잡아서 산제당으로 제물과 함께 가지고 올라간다. 제관들은 제물을 진설하고 유교식으로 제사하게 된다. 축문과 홀기가 있다. 닭을 쓸 때에는 반드시 닭털과 닭의 피를 고기와 함께 올리며 닭털과 피는 제사 후에 제당 밑에 묻는다.

비봉산 서낭제

양구 고을의 현감이 주재하던 이 제의의 전승은 끊어졌으나, 1984년도 강원도 민속경연대회 때 양구의 민속놀이로 변형시켜 선을 보였다. 원래 비봉산 서낭제는, 제사일이 정해지면 도가를 선정하고 3일전에 도가와 서낭당에 ‘검줄(儉繩)’이라는 금줄을 치고 부정을 가렸다. 부정한 사람은 서낭당 근처에 접근치 못하며, 택일한 후에 초상이 나거나 부정한 사건이 발생하면 제사를 연기하였다. 서낭제에는 목욕재계한 사람만이 참석하나, 마을사람 모두가 신의 음식을 나누어 먹으면서 즐겼다. 헌관은 대개 연장자 순으로 정하였다. 이 서낭제를 놀이화한 한마당의 내용은 서낭당에 관련된 구비설화인 <변부자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양구읍 고대리에 부자이었지만 인색한 변부자가 살았는데 4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들을 보게 되어 애지중지 하면서 키웠다. 그러나 아들은 커가면서 싸움질과 행패를 일삼아 마을 사람들과 변부자를 괴롭혔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변부자의 아들이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는 그가 몹쓸 병에 걸려 누워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변부자의 아들이 서낭당에 올라가 오줌을 싸고 금줄을 끊어 불에 태워 버렸으니 앓아 눕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들 수군거렸다. 게다가 이 재앙이 변부자 뿐 아니라 양구고을 전체에도 내릴 것이라고 웅성거렸다. 변부자가 유명한 점쟁이를 불러 물었더니 서낭신의 노하심으로 비롯한 재앙이라고 하였다. 변부자는 길일을 택하여 서낭신에게 굿을 해주고 지성으로 빌어 마침내 아들을 살려내었다는 것이다.

방산면 동두보제

방산면의 송현리와 장평리 자월(自月)을 연결하는 4km에 이르는 동두보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인 숙종 때 장사인 박제룡이 엄동설한에 홀로 박달나무 가래로 구축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의 보는 그 터에 근래에 와서 콘크리트로 다소 개축해서 쓰고 있는 것으로 관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유달리 몸집이 크고 힘이 센 박장사를 아직도 박장군이라고 부르며 많은 전설들이 남아있다. 그가 이 보를 만들 때 이 모양을 보고도 비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늘 술과 담배를 권하며 달랬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이런 공덕을 기리는 뜻에서 해마다 음력 4월 8일이 되면 송현1, 2리와 장평리 자월부락 사람들은 공동으로 제물을 마련해 제사를 지내왔다. 제사를 지낼 때 금기를 철저히 하고 산신(山神), 수신(水神), 박신(朴神) 등 세 위패를 모시고 송현 동두봉의 강기슭에서 보(洑)제사를 지내면서 그 해의 풍작을 빌었다. 예전에는 소를 잡아서 제상을 차렸지만 근래에 와서는 돼지를 잡아 간소하게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나 제사를 지내는 의식절차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제관인 박장사의 9대손인 박현준은 말한다. 박장사의 묘는 장평리 자월에 있으며 그 후손들은 지금 같은 자월부락 샛마을에 살고 있다.

도솔산 기우제

높이 1,148m인 도솔산은 동면 팔랑리와 만대리 경계에 있는 고산으로 양구읍에서 동쪽으로 16km나 떨어져 있으며 예부터 ‘돌산령 타령’을 비롯하여 갖가지의 사연을 많이 전해주고 있다. 또 1951년 6월 4일부터 6월 20일까지 해병대 1개 연대가 적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전개된 격전지이다. 포격이 멎은지 30년이 지난 지금은 동식물의 보고로 널리 알려진 명산이기도 하다.조선시대에는 동면과 해안면 주민들은 한 해 농사철에 가뭄이 극심하여 곡식이 타 죽어 버릴 기상조건이면 돼지머리를 비롯한 제물을 부락민 공동으로 준비하여 관내의 사명산ㆍ대암산과 제당에 올라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의식 절차에 따라 제관이 제물을 진설하고 난 후에 소지를 올린다. 당시만 하여도 이 도솔산에는 호랑이가 득세하여 호랑이 등의 피해를 막기 위한 공동의 금기를 지키며 마을 공동의 평안과 행복을 비는 제사를 겸하여 지내기도 하였다. 1587년(선종20년) 김현도 양구현감 때 당시 도솔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는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암산 용연 기우제

동면 팔랑리와 만대리 그리고 인제군 서화면 서흥리와의 경계에 있는 높이 1,316m의 대암산이 있다. 이 산은 펀치볼분지의 외랑산릉(外廊山稜)인 대암산에서 북방 약 2km지점에 위치하는 무명의 산봉(1,304m)서 남쪽 약 1km지점에 넓이 약 200m길이 약 300m 정도의 용연(龍淵, 용늪→高層濕原)이 있다. 해마다 동면이나 서화면의 유지들이 제각기 그 해의 종사에 흡족한 비를 내려 달라고 기우제를 올리고 있다. 산 개를 끌고 가서 피를 뽑아 용늪에다 뿌리고 제문을 읽는다. 또한 가뭄이 계속되는 해에도 5월말이나 6월 초순이면 기우제를 지낸다. 이 용늪은 고층습원(高層濕原 : 고도가 높은 곳에 있는 습기 찬 들판)으로 경남 무쌍산과 함북의 대택, 한남 백두산의 장지(醬池), 오십리지(五十里池)와 함께 우리 나라에는 5개 처만 알려진 곳이다. 금단(禁斷) 30년간 인위적인 힘이 가해지지 않아 각종의 희귀 생물이 풍부하여 학술적인 가치가 있어 생물학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양구의 명산인 도솔산(1,148m) 이외에도 사명산(1,198m)에서도 예부터 기우제를 올린 기록이 동국여지승람 증보판(東國與地勝覽 增補版, 1530)에 ‘...산정유지천한도우(山頂有池天旱禱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설에도 용늪이 명당이라고 해서 누가 늪 속에 암장(暗葬)이라도 하면 큰비가 몹시 내리니 부근의 주민이 시체(屍體)를 파 버려야 비로소 비가 그친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대정리 용수제(湧水祭)

양구에서 200여리 지점인 미수복지구(未收復地區)인 수입면 대정리에서 태평성대와 풍년을 기리는 ‘용수제(湧水祭)’라는 제의가 있었다. 대정리에는 직경20m 깊이 4m 가량의 대정(大井, 큰우물)이 있어 예부터 이 물을 농업용수로 충당하고 있어 가뭄이 있더라도 흉년을 면해 왔다. 만약 대정에서 물이 끊기면 마을에서 성곡(誠穀)을 모아 제물을 마련하여 용수제(湧水祭)를 거행하였다. 길일을 택하여 마을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이 날부터 용수제를 지내는 그 날까지 제주는 매일 목욕제계(沐浴齊戒)하고 상가조문(喪家弔問)도 상가하고 침실까지 별실을 쓰고 용수지에 임한다. 용수제가 정성껏 거행되면서 수일 내에 산의 기골(氣骨)로 해서 맑은 용수도 쏟아져 나오고 자취를 감추었던 물고기도 물줄기를 따라 나오니 이 용수제는 관례적인 민속신앙으로 관념화되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용수의 보존을 위해 예부터 물고기를 잡지 않으며 목욕과 세탁을 삼가고 용수 머리로 상여가 지나가지 않도록 금기사항으로 지켜오고 있다. 이 사항에 위배되면 부정을 타서 용수가 단절되고 물고기까지 지중으로 잠입한다니 마을사람들은 용수를 신수(神水)로 여기고 있다.

가신신앙

가신(家神)은 집안을 보살펴 준다고 믿는 공간적으로 가택에 위치하는 여러 신에 대한 신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정 단위의 신앙이며 그 담당자는 대체로 여성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신에게 정기적으로 의례를 올리게 되는데 이를 양구 지역에서는 <안택>, <안택고사>라 한다. 가신에는 성주, 조상, 삼신, 조왕, 터주, 문신, 뒷간신 등이 있으며 이 신들은 일정한 자리를 차지하고 상호간 공존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농촌지역과 마찬가지로 양구지역에서도 오늘날에는 이러한 가신신앙은 많이 퇴색하고 있으며 제의 자체로 간략하게 되어서 성주, 조왕, 삼신 정도의 가신만을 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안택고사

안택고사는 토지, 성주, 조왕의 3신을 제사하는 행사이다. 가족 모두는 제사일이 정해지면 모두 제계해야 한다. 양구에서는 대체로 추수가 끝나는 음력 10월에 안택고사를 올린다. 안택고사는 가족의 생기와 일진을 맞추어 길일을 골라 행사한다. 이 때에는 축문과 독경을 읽기도 하고, 무녀나 독경을 읽는 복술을 부르기도 한다. 안택일이 정하여지면 가옥 주변에 황토를 펴고 대문 위에 금색을 하게 된다. 토지신에게는 대주의 소재한 지상에서 오곡이 풍성하고 육축(肉畜)이 번성할 것을 기원하며 성주신에게는 가옥과 토목의 축조 및 가족의 안녕을 기원한다. 또 조왕신에게는 화식(火食)을 잘 보우하여 달라는 기원을 드린다. 제물은 팥 시루떡을 주로 하며 메ㆍ갱 그리고 주과포, 어육을 올린다. 절차는 먼저 성주신에게 빌고 다음으로는 토지지신, 조왕신의 순서로 빌게 된다. 무녀와 복술이 없이 집주인이 비손할 때에는 대주의 이름과 생년을 대고 금년에도 무병장수하게 하여 주시고 농사도 잘 되매 아무 탈 없이 잘 되게 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나서 가족 구성원들의 이름과 생년을 대면서 소지를 올린다. 금기로는 안택제의 기간에 금줄을 쳐 놓으면 가족만 출입이 가능하며 이 때, 상주, 문상, 죽은 짐승, 화재, 살생 등을 보아서도 해서도 안 된다. 만약 식구 가운데 부정한 사람은 제의가 끝날 때가지 집으로 들어오지 못하며 친척집에서 생활해야 한다. 무녀와 복술이 제사를 올릴 때에는 대주는 계속 절을 올리고 징이나 북을 울리며 경문을 읽게 한다. 복술의 독경은 토신경(土神經), 조왕경, 성조경, 안택경, 명당경, 봉송환위경을 차례로 읽게 된다.

  • ※ 토지신

    토지신은 가신으로서 가옥의 집터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토지신은 ‘터주’ 또는 ‘터주대감’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토지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상을 차려 제물 그리고 토신경이라는 경을 읽어 축원한다. 양구지역에서 일정하게 토지신을 모시는 장소는 없으며 신체 또한 없다.

  • ※ 성주신

    토지신은 가신으로서 가옥의 집터를 담당하고 있는 신이다. 토지신은 ‘터주’ 또는 ‘터주대감’등의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토지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상을 차려 제물 그리고 토신경이라는 경을 읽어 축원한다. 양구지역에서 일정하게 토지신을 모시는 장소는 없으며 신체 또한 없다.

  • ※ 조왕신

    부엌에 모시는 신으로 ‘화신(火神)’ 또는 ‘부뚜막신’이라 한다. 아궁이를 관장하며 재산신에 해당한다. 이 조왕신은 안택고사를 드릴 때 토지신, 성주신과 함께 제를 올린다. 밖에서 음식이 들어오거나 좋은 음식을 마련하였을 때 조왕신에게 솥뚜껑을 뒤집어 놓고 그 위에 올려놓는다.

무속신앙

무속신앙은 무당을 주축으로 민간에서 전승되고 있는 종교 현상이다. 무속의 신앙대상은 유일신이 아니라 다신(多神)을 신봉함으로써 다양한 신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무속은 현대적 차원에서 인위적 손길이 미치지 못해 원시 종교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뿐 종교로서의 제 요소를 구비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간신앙의 특징은 바로 이 종교로서의 체계나 조직이 없는 것에 있다 하겠다. 양구지역의 무속신앙은 강신무 계통의 무당이 주축을 이룬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만신(보살)인데, 이들은 대체로 점을 치거나 굿을 한다. 또한 이들은 점술, 신수, 사주, 궁합, 택일을 하며, 집안에 우환이 있을 경우에 작은 푸닥거리를 한다. 또한 안택고사 때에 제문을 읽거나 경을 읽으며, 재수굿을 하기도 한다. 또한 마을동제 때에 무당이 있는 마을은 이들이 참여하여 소지와 함께 비손을 해 주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양구지역에 단오절날 큰 마을굿이 있었다는 기록이 성현의 서문집에 있어 주목할 만하다. 조선 중기때에 학자 성현(1439~1504)은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는데 양구를 지나며 노래한 <제양구헌운>, <식방천역정>, <영신곡>, <송신곡> 등 4수를 그의 문집 허백당집에 남겼다. 시에 보면 이 지역의 무속적 편린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 <영 신 곡>

    • 새벽에 젓대를 화산에서 부는데
    • 단오날 성황신 집집에 내리누나.
    • 다투어 바람타고 서로 전파하니.
    • 검은 머리태 구름같이 모여드네
    • 늙은 무당 변장한 신어 내리며
    • 삽시간에 왔다갔다 동작도 빠르네
    • 술 빚고 밥 지으며 평화롭게 오가며
    • 으슥한 달 밤 길거리를 쏘다니네
    • 빨간 꽃처럼 아름다운 청춘남여
    • 우연히 서로 만나 다투어 희학하네
    • 신심으로 인한 음식 취하니 즐거워
    • 청조의 오색 약속 필요치 않구나.
  • <송 신 곡>

    • 푸르는 운림엔 교목이 많은데
    • 지량을 심어서 소옥을 둘렀네
    • 북 소리는 고요한 골짜기를 울리고
    • 청요와 황독을 제물로 썼네
    • 서로 다투어 백곡을 비옵나니
    • 음사는 해마다 성속이 되는구나
    • 3일을 즐겨도 오히려 부족하여
    • 호문을 향하여 실료를 감출하네
    • 쓸쓸한 바람앞에 지전을 불태우니
    • 깃발은 아득하여 잡을 수 없구나
    • 거리에 꼬마들은 구경위해 모여들며
    • 송신의 대열은 송만으로 돌아가네
  • 위의 <영신곡>에는 단오의 세시와 관련하여 성황신에게 무당이 굿을 하는 모습, 그리고 수많은 주민들이 참여하여 성대하게 치루어 내는 축제적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송신곡>에서는 제의 목적, 3일간에 걸쳐 신을 모셔 돌려보내는 의식 등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미루어 짐작한다면 이 양구에서도 제의, 놀이, 축제의 기능을 담당했던 무속적 제의가 역사적으로 있었음이 확인된 셈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러한 마을굿 형태의 성대한 제의는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